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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일제강점기 카페문화와 '웨이트리스'의 삶

구리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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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 규정 네 정치&시사 글이 아닙니다

사진2.jpg 일제강점기 카페문화와 \'웨이트리스\'의 삶
 

"북촌에도 끽다점(喫茶店)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남촌처럼) 그렇게 감심할 만한 좋은 커피가 없는 것이 저는 섭섭합니다."

- 구보씨의 일일 中,

 

 

일제강점기였던 1920년대 중반, 서양식 카페가 경성에 처음으로 들어섬. 주 고객층은 일본인들이었고 주로 명동이나 소곡동 같은 곳에 밀집해 있었음. 

 

이 당시 카페는 요즘 같은 커피전문점이 아니었음. 어두운 조명에 잔잔히 울리는 재즈, 벽에 걸린 찰리 채플린의 영화포스터와 모딜리아니의 그림 모작들, 밤이 되면 무대에서 흥겨운 피아노 반주와 댄스회가 열림.

술도 팔아서 새벽까지 운영했으며 연주회나 전시회, 낭독회가 열림. 말이 카페지, 사실상 살롱이었음.  가격은 당연히 매우 비쌌음. 평균적으로 손님 1인 당 10.5원(당시 1원=12,300원)을 썼다고 하니 한번 가는게 요즘으로 치자면 룸빵에 맞먹는 비용이 들었음. 

 

근대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던 식민지 조선에서 카페는 지식인들의 향락 공간이자 지성의 토론장이 되어줌. 고등교육을 받은 인텔리와 가난한 예술가, 돈 많은 부잣집 도련님, 총독부 관리들까지 조선팔도의 인싸들은 다 모이는 핫플레이스였던 셈임.

 

 

 

 

 

 

 

 

htm_20110903004640a000a010-002.jpg 일제강점기 카페문화와 \'웨이트리스\'의 삶  

 

60507_45588_3913.jpg 일제강점기 카페문화와 \'웨이트리스\'의 삶


 

그리고 이런 새로운 개념의 문화공간에는 웨이트리스(Waitress)라는 직종이 들어서게 됨. 이들은 대부분 시골에서 상경했거나 평민집안 출신이었음.

 

당대에 '모던 걸'이 유행했지만 매체에서 묘사하는 이상적인 모던 걸은 돈 많은 (그리고 부모들이 딸을 공부시켜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깨어있는) 집 딸들이나 가능했음. 

신분제도 폐지되고, 세상이 바뀌었다곤 하지만 아직 한반도는 일부 도시를 제외하면 개화기 시절에서 한치도 달라지지 않은 상태였고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매우 어려웠음.

그렇게 신여성에 대한 동경을 품은 조선팔도의 젊은 인들은 너도나도 웨이트리스라는 직업에 몰리게 됨. 딱히 학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적당히 예쁘고 미소를 잘 짓기만 하면 되니까 진입장벽도 낮았음.

이들은 대부분 당대 신여성의 상징이었던 단발머리와 파마를 했었고 서구식 복식과 립스틱, 하이힐을 신었으며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돈을 벌어 사회생활을 하는 당돌한 이미지로 이제 막 근대에 발을 걸친 식민지 조선의 새로운 문화적 아이콘으로 떠오름. 

 

 

 

 

 

 

81-540x351.jpg 일제강점기 카페문화와 \'웨이트리스\'의 삶

 

 

이들이 했던 일은 지금의 종업원과 다를게 없는 서비스직이었음. 커피를 타주고 술잔을 내어주고, 가끔씩 손님들의 말동무도 해주는 일이었음.

여성들은 카페에서 일하며 자신들이 좀처럼 다가갈 수 없었던 계층의 인물들과 말을 나누고,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야반도주를 하기도 했으며 역경을 이겨내고 결혼까지 올리기도 했음. (요즘으로 치자면 여성향 판타지 그 자체?) 

 

이들은 공식적으로 월급을 받지 않았고 손님들이 주는 팁이 유일한 수입이었음. 평균적으로 한달에 30~40원을 벌었다고 함. 당연히 이 돈으로 생활이 될리가 없었고

개인적으로 남자손님들의 정부(情婦) 역할을 해주며 생활비를 받는 여급들이 많았음. 당시에는 이런 행태를 '연애시장'이라고 불렀음. 말 그대로 돈 주고 연애를 한다는 것. (렌탈 여친?)

 

 

 

 

 

 

 

 

14753-medium-size.jpg 일제강점기 카페문화와 \'웨이트리스\'의 삶

 

 

복장은 서구식 종업원 복장부터 일본 기모노도 다양했음. 초창기에는 일본에서 건너온 여성들이 주를 이뤘으나 1930년대 카페 문화가 발달하자 대부분 조선인들로 채워짐. 이들은 기모노를 입고 일본어만 쓰고 일본식 가명으로 불리우는 등 철저히 자신을 숨김.

1920년 러시아가 공산화되자 연해주에서 망명 해온 러시아 백인여성들이 카페여급으로 잠시 일하면서 본의 아니게 생태계를 교란하기도 했다고 함. 

 

잘 나가는 웨이트리스는 연예인과 비슷할 정도의 인기를 얻었고 이들에 대해서 다루는 잡지도 발행되어 그녀들의 패션과 가십을 실기도 함. 

자신이 좋아하는 웨이트리스에게 선물을 사주고 돈을 갖다 바치다가 금은방 절도까지 저지르고 감옥에 간 사내, 혹은 집안 땅 다 팔아먹고 알거지가 된 만석꾼 집안 막내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신문에 나기도 함.

이렇게 신문물의 향락에 취해 주색잡기에 열중하던 청년들을 가리켜 '핑크'라고 부름. (반대로 당대 유행하던 사회주의 사상에 물들어 급진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한 이들을 가리켜 마르크스보이, 엥겔스 걸이라고 칭함.)

 

 

 

 

 

 

p18gdffim3i54ahqhqq1ghf33k1.jpg 일제강점기 카페문화와 \'웨이트리스\'의 삶

 

 

참고로 당대에는 조선시대의 유산인 '기생'이 여전히 존재했고 매춘부들도 존재함. 하지만 웨이트리스들은 이들과는 별개의 존재로 인식되었음. 하지만 그녀들이 그토록 바랬던 지적 이미지의 모던걸과도 역시 차별화 됨. 사회적으로 이들은 결국 '신여성과 직업여성 사이의 다른 무언가'였던 거임.

 

세련되었지만 살짝 퇴폐스러운 이미지는 오히려 일종의 로망으로 여겨짐. 이상의 일제강점기 문학인들에게도 웨이트리스는 일종의 매력적인 일탈로 여겨졌고 뮤즈로 삼기도 함.  멀리 안 가고 한국 근현대 문학 속에도 이런 '여급'들이 기생처럼 자주 묘사됨. 

 

참고로 이런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의 '간질간질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한국에도 연애(戀愛)라는 단어가 도입됨. 

(연애는 19세기 일본에서 romance를 한자로 번역하면서 생겨난 말임.  본래 조선시대에는 사랑을 표현하는 뜻으로 주색, 정분, 애정 같은 말들만 있었음.)

 

당연히 아직 19세기 '오리지날 유교 탈레반 사상'이 사라지지 않았던 식민지 조선에서는 이런 카페문화를 퇴폐적으로 아니꼽게 보는 장년층들의 쓴소리도 자주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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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에 들어서자 조선인들이 사는 구역에도 카페가 생기기 시작함. 주로 일본에 유학 갔다 온 조선인들이나 친일파 2세들이 새로운 사업으로 겸하며 오픈했음.

시인 이상이 열었다던 제비다방도 이런 류의 카페였음. 카페가 대중화되면서 인식 또한 조금 바뀌었는데, 웨이트리스들의 매춘행위가 점점 노골적으로 늘어가자 조선총독부가 여급직종 종사자에 대한 성병검사를 실시했고 이들을 일종의 직업여성으로 구분함.

이 때문에 30년대부터 '카페 간다 = 계집질 하러간다'는 뜻으로 쓰이게 됨. 오죽하면 ‘에로의 신전’ 또는 ‘향락 제작소’라고 불림.  이때 조선총독부가 집계한 경성지역의 웨이트리스 종사자 수는 약 2400여명 정도임. 

 

 


 


 

99E94D445BE34D9112.png 일제강점기 카페문화와 \'웨이트리스\'의 삶

 

그러나 1934년 조선총독부가 카페영업법을 제정하여 여급들의 고정월급 지급, 영업시간 제한, 조명을 밝게하고 무대장치 철거 및 춤과 술판매를 금지함.

나름 개념있는 행보로 보일 수도 있으나 이는 사실 세수를 늘리려는 수작이었음. 여급들에게는 월급에서 세금 떼고, 암묵적으로 허용됐던 술 판매는 주세를 뜯지 못하니까 아예 막아버린 거임.

 

이로 인해 조선의 카페문화는 점차 쇠락의 길을 걸음. 이 때부터 카페는은 술을 마시는 곳이 아닌 '차와 커피를 마시는 곳'으로 변함.

 해방을 거쳐 카페는 '한국식 다방'으로 변화되었고 일부는 아예 술집으로 업종을 바꾸면서 생존을 꾀함. (야인시대 김두한이 부하들과 자주 갔다는 'BAR MEXICO'도 이렇게 업종전환으로 살아남은 카페의 흔적임.) 

 

 

 

 

 

 

 



 

다운로드.jpg 일제강점기 카페문화와 \'웨이트리스\'의 삶
 

246B0749593643CE0A.jpg 일제강점기 카페문화와 \'웨이트리스\'의 삶
 

 

아쉽게도 현대 한국의 영상매체에서는 이런 이런 카페문화가 별로 등장하지 않음. 그 중에서 이를 조금이나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암살'임.

작중 전지현이 분한 안옥윤이 커피를 마셔보고 싶다고 하는 장면, 경성에서 조력자인 황마담의 아네모네 바에 모여 춤을 추는 장면등을 통해 나라를 잃고 암울했던 시절, 우리나라 사람들의 서양문화에 품은 환상을 어렷풋하게나마 감정을 이입 해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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