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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정보] 필리핀에서 간신히 도망친 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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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아베 카츠미

 

쇼와 19년*(1944년) 12월 24일 이른 아침, 해몰함선 생존사관 10명을 태운 DC3 수송기는, 일출과 함께 시작되는 미군기 내습을 피해, 마닐라의 니콜라스 비행장을 날아 대만으로 향했다.

 

 

의자도 거의 없는 기내에서 나는 바닥에 구른 비행기의 예비 타이어에 걸터앉아 무릎을 껴안은 채 겨우 마닐라를 떠났다는 생각에 잠겼지만 이내 적기 잘 지켜봐 달라는 조종사의 목소리로 현실로 되돌아왔다.

 

 

 

 

1 낙일의 마닐라

 

 

12월 13일 저녁 기름투성이 구축함 키리 편으로 마닐라에 도착한 뒤 열흘 남짓한 마닐라 난민생활이었다. 거기에는 다수의 침몰함 승무원이 있었다.해군에서는 이들 침몰함의 승무원, 특히 사관을 가능한 한 많이 내지로 돌려보낼 수 있도록 비행기를 수배했지만, 그 수는 뻔했고, 또 적의 침공이 빨라 12월 15일에는 레이테에서 돌아오는 '키리'의 흔적을 쫓듯이, 적 상륙부대는 루손섬 남쪽 민1도로섬에 상륙, 항공기지를 정비하고 함재기와 맞물려 일중 마닐라 상공은 무수한 적기가 날뛰는 상황이어서 마닐라 탈출은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12월 12일 레이테섬 9차 다호작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폭격으로 키리와 함께 침몰한 뒤 다카다가 탄 오동나무의 도움으로 13일 마닐라에 상륙했다. 수교사에 배정된 에르미타 지구의 듀이(지금은 로하스) 대로 1000번지의 고층 호텔(문말주 참조)에는 침몰함 사관들이 빽빽이 들어차 비행기 순서를 기다렸다.

 

 

호텔 방에는 깨끗한 침대는 있었지만 전력이 부족하거나 엘리베이터는 움직이지 않았고, 따뜻한 물도 나오지 않았다.

 

 

방 안에서의 전망은 멋졌지만 방파제 안팎을 가리지 않고 항구를 가득 메운 것은 엄청난 숫자의 일본군 침몰함선이었다. 수심이 얕아 두 동강 나거나 화재로 짓무른 배의 잔해가 수없이 수면에 드러나 있었다. 내가 마닐라에 처음 입항한 것은 19년 6월 말이었지만 그로부터 불과 반년 만에 마닐라는 일본 함선의 무덤이 되고 말았다. 바로 근처의 남쪽 부두에는 경순양함 키소가 반쯤 가라앉은 채로 착저해, 군함기는 아직 게양돼 있었다.키소는 바로 1개월 전 11월에 내가 타고 있던 30구축대의 유즈키가 호위하여 마닐라에 들어가 남서방면 함대의 사령부가 사용한다고 해서 마닐라에 남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미군 기동부대의 공습으로 격침되고 말았다. 적의 표적으로 삼기 위해 마닐라에 남긴 것 같다. 적의 평문을 들은 바로는, 「키소」의 엄숙한 전방 종각이나 굴뚝 3개를 보고 미군기 편대장은 「구식 전함」이라고 믿어, 공격을 집중했다고 한다.

 

 

적의 민1도로섬 상륙으로 마닐라항은 봉쇄될 우려가 생겼다. 잔존 일본 함정은 15일 일제히 마닐라를 탈출했다. 이날 우연히 남부 부두의 키리를 찾은 내게 반 친구 다카다 주케이는 지금부터 탈출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어떻게 되나라고 순간 생각하다 나만 태워다 달라고 할 수1도 없고 '신세 많이 졌다. 서로 건강하게 잘 지내자'며 헤어졌지만 전시 급조정형 구축함 키리의 얄팍한 철판에는 고양이가 할퀴고 간 맹장지처럼 무수한 기총탄흔이 있어 이러면 겨울의 중국해를 건널 수 있을지 솔직히 걱정했다. 마닐라에 남는 것은 「지옥」이지만, 「키리」로 도망치는 것도 「극락」행인지는 몰랐다. 숙소로 돌아오자 사와무라 사령관 키리에는 유즈키의 생존 승무원들을 태우고 돌아가게 하고 싶었다고 탄식했다.

 

 

2 생사를 가른 마해방

 

 

수교사에 머문 지 며칠 후 이른 아침 창밖으로 아래를 보니 마닐라만을 따라 펼쳐진 넓은 듀이 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걸어가는 육군부대가 길고 길게 줄지어 서 있었다. 너나 할 것 없이 도보로 배낭, 소총, 기타 온갖 장구를 차고 다녔고 후텁지근한 날씨 아래 군복에는 이미 땀이 배어 있었다. 군인들은 짐과 기관총을 가득 실은 리어카를 끌고 너나 할 것 없이 앞을 내다보며 걷고 있었다. 개미처럼 북쪽으로 향하는 대열을 보는 순간 육군은 마닐라를 포기할 생각이구나, 해군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에 불안에 떨었다.

 

 

사실 육군 야마시타 사령관은 레이테 결선에서 산하 유력부대를 잃은 현재 평야에서의 미군과의 조우전과 마닐라 방위를 포기하고 루손 북부 산악지대로 전진을 결정했다. 내가 본 것은 육군의 어떤 부대인지 알 수 없으나 상상을 초월하는 화력과 물량, 기동력으로 밀고 들어오는 미군에 대항하기에는 너무 전근대적인 장비였다. 자동차도 대포도 보이지 않았다. 리어카에 실은 기관총도 육군의 제식 장비가 아니라 유난히 길고 커서 해군의 25mm 또는 13mm 기총처럼 보였다. 침몰함선에서 가져온 것일까. 어쩌면 승선한 배가 가라앉은 침몰부대였는지도 모른다.

 

 

내 신병에 대해 사와무라 사령관이 말하길 너는 좌진부가 됐다고 했으니 차례가 오는 대로 귀국해 부임해야 하는데, 이런 상태로는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물론 알 수 없다.

 

 

그나마 수송기는 며칠 간격으로 찾아왔고 사와무라 30구축대 사령, 마쓰모토 유즈키 함장, 나카무라 군의장, 니시자와 기관장 등은 차례로 귀국했지만 숙박객이 줄어든 것은 주로 마닐라 해군 방위부대(마해방)에 징발된 사람이 많기 때문이었다.

 

 

육군이 포기하는 마닐라를 해군은 단독으로 방위하기로 한 것이다. 방위대 징발이 먼저냐, 비행기 차례가 오는 것이 먼저냐로 운명이 결정됐다 .방위대에 갔던 사람들은 거의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미군의 루손섬 상륙을 목전에 둔 이런 때에, 「좌진부」라고 해도, 현지의 사령부나 특근(특별 근거지대)의 사정으로 누구라도, 언제라도 징발될 수 있었다. 어느 날 나는 해경 선배인 야마자키 다케오 주계 대위(31기)를 남서 방면 함대 사령부로 찾아가 인사했다. 그는 '이런 시기에 일본으로 돌아가는 건 잘못됐다. 내가 사령부에 뽑아줄 테니 여기 남아'라고 했다. 사령부에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지만 솔직히 딱 질색이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부랴부랴 도망쳤지만 절망감에 짓눌려 돌아오는 길에 걸을 때마다 다리가 무릎까지 저 로하스 대로변 콘크리트 포장 속에 처박히는 것 같았다.그때 넓은 로하스 대로변은 자동차커녕 인적이 거의 없어 열대의 태양만 내리쬐는 죽음의 도시나 다름없었다. 현지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뒷골목이나 집 안에는 엄청난 수의 필리핀인이 있었다. 그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아사에 위협을 받으면서 일본군의 패퇴와 미군의 상륙, 승리는 자명한 일로, 혹자는 게릴라 활동을 하거나 전화에 떨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수교사에 돌아와서도 야마사키 씨가 한 말이 귀에 선해 드디어 마닐라에서 죽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밤잠을 설쳤다. 그러나 하룻밤 자고 나니 이상해서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역시 젊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불안을 없애기 위해서는 일을 하는 것이 제일이었다. 함이 가라앉고 끝나서 별 일도 없었지만, 피복 수령 등 내가 안 해도 될 일이라도 군인과 함께 트럭을 타고 나갔다.

 

 

야마자키 씨로부터의 「징발」은 그 후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이 사람은 깊은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말했을 뿐인 것 같았다. 남서방면 함대사령부 자체가 얼마나 마닐라 방위에 확고한 방책을 갖고 있었는지 의문이다. 내가 봐도 사령부의 스탭은 철퇴를 앞에 두고 혼란 상태에 가까웠다(야마자키씨는, 사령부와 함께 루손 북부의 산악 지대에 도망쳐 종전까지 도피했다).

 

 

일본 수송기는 밤 늦게 도착했고 사령부 기관 참모가 명단 중 귀국 탑승자를 선정해 그날 밤 본인에게 통보했다. 지정된 사람은 다음날 이른 아침 공중제비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23일의 밤 9시경 「유즈키」의 선임 장교로 수뢰장 니시무라 유키오 대위(병 71기로 이미 마해방에 전속되어 있었다)가, 「다음 날 새벽 버스를 타도록」라고 통지했다. 니시무라 대위는 열혈한으로 매사 자기 의견을 분명히 내세우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마해방 전속을 설득하는 31특근의 육전 참모에게는 끝까지 구축함에 타서 죽고 싶다고 애썼다. 하지만 말미에는 그 참모는 주머니를 털어서 군도 군복 기타 장비 한 벌을 사줬다. 더 이상 참모들의 열의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며 울며 승낙한 것으로 알려졌다.그래도 내게 내일 비행기를 타라고 전하는 니시무라 대위의 눈에는 마음 탓인지 부러운 빛이 떠올랐다. 어쨌든 총을 잡는 게 셋 중 하나, 나머지는 죽봉이나 검 뿐인 침몰함 승무원을 모아놓은 육전대를 이끌고 근대 장비인 미군과 싸우니 도무지 제대로 된 전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같은 71기의 항해장 미즈타니 히로야스 대위는 대조적이어서 육전대에 가기로 결정되어도 태연자약하다.

 

 

내가 그날 밤 늦게 마지막 인사를 하며 '가족들에게 편지를 쓴다면 전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이거절하고 '나는 여기서 죽을 거야'라며 활짝 웃었다.원래부터 흔들리지 않는 침착한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죽음을 여기까지 달관하고 있는 것을 보고, 아무 말도 못하고 헤어졌다. 니시무라, 미즈타니 두사람 모두 20년 2월 중하순 마닐라 동방 진지에서 전사, GF장관의 표창장을 받아싿.

 

 

이 밖에 갑작스러운 귀국으로 인사도 하지 못해 아쉬움을 남긴 건 유즈키의 옛 부하 주계병들이다. 다호작전에서의 3차례에 걸친 대공전투에서도 1명의 사상자도 나오지 않았지만 전원이 마해방역에 징발됐다. 살아서 일본 땅을 밟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니 말도 안 나온다.

 

 

마닐라 103운수부에는 급우 마에다 마사히로와 1기 선배인 이이자와 기요토시 주계 대위가 있었기에 밤에는 마에다에게 가 제대로 마시지도 못하는 위스키를 사거나 셋이서 전국 예상을 하기도 했다. 내가 마닐라 부근은 평탄하고 진지도 파지 못하며 도로도 좋아 적이 상륙하면 전차나 자동차의 기동력을 이용해 순식간에 마을을 제압할 것이고, 이런 곳에서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죽는 것은 싫다고 말하자, 이이자와씨는 험악한 눈초리로 아니, 적의 전차는 육공(폭탄을 안은 육박공격)으로 할 수 있다(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네놈은 전근 명령도 받았으니 돌아가라고 했다. 나는 내심 실전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사실 마닐라에서의 전투는 내 예상대로였지만), 이이자와씨의 진지한 시선에 눌려 입을 다물고 말았다. 또 여기서 확실하게 죽을 두 사람 앞에 비관론을 되풀이하는 것은 속이 상할까봐 할 말이 없었다. 반의 마에다는 말없이 묵묵히 마시고 있었다. 신세진 두 사람 모두 작별 인사를 나눌 틈이 없었다.

 

 

이이자와 씨는 이듬해인 20년 2월 초 마닐라 동부 요지를 수비하는 니시야마 대대에서 전차를 앞세운 미군의 공격을 내가 들은 대로 육박 공격으로 격퇴했지만, 잦은 적 전차의 습격에 부대는 큰 손해를 입어 사분오열되고 말았다.이이자와 씨가 전사한 것은 그 후 20년 2월 22일로 알려져 있다.

 

 

이이자와씨도, 제2대대의 니시무라, 미즈타니 두 대위도 적에게 포위되어 탈출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마에다는 1월 초 마닐라 방위부대와 결별한 뒤 탈출부대를 이끌고 도보로 북상, 2월 초에는 점차 수백km 떨어진 카가얀 하곡에 이르러 종전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산악전을 벌였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50년 가까운 후로 반 교토 여행 때다. 잘 살아남아 줬다. 그는 마닐라에서 헤어지고 나서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서 신기하다.

 

 

3 낮은 계급부터 내려라

 

 

서론이 길어졌지만, 12월 24일 아직 깜깜한 오전 3시경 일어나 몸차림을 했다(라고 해도, 입은 몸, 입은 채로 작업복-육전복(타카다에게 「키리」에 있던 걸 받았다)을 입었을 뿐이다).10여 명의 승객은 버스로 니콜라스 비행장으로 향했다. 게릴라나 적기가 무서워 실내등은 물론 전조등조차 켜지 못했지만 호위병은 없었다. 깜깜한 비행장에 도착해 활주로 끝으로 내려섰지만 놀란 것은 길게 이어지는 높이 몇 m가 될까 싶은 회백색 두랄루민층의 산이었다. 물론 적기의 습격으로 파괴된 일본기의 잔해가 말이다. 비행기 잔해를 트랙터로 밀어내고 활주로를 살짝 열어 이착륙했다.

 

 

우리가 탈 더글라스기는 100미터 남짓한 곳에 있었지만 조용하게 움직일 기미도 없었다. 1시간이나 기다렸지만 슬슬 동쪽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빨리 떠나지 않으면 적의 공습이 시작되는데라며 모두가 초조해 할 무렵 조종사, 부조종사 두 명이 나타났다.보아하니 두 사람 모두 잠이 부족한 듯 언짢아 보였다. 두 사람은 비행기에 들어갔다가 잠시 후 나왔다. 어딘가의 핀이 부러졌거나 해서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이거 큰일 났구나 싶었다.둘은 수리를 하고 다시 2,30분이 지나면서 날이 완전히 밝아지고서야 끝났다. 마침 그 무렵에야 부르릉 소리를 내며 시동이 걸렸다. 승객들은 안심하고 모두 비행기에 올랐다. 기내에는 의자가 두세 개밖에 없어 대부분의 손님은 바닥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 일은 아무래도 좋고, 이것으로 살았다. 그런데 조종석에서 조종사가 얼굴을 내밀어 승객 수를 세며 '14명인가, 이 비행기는 다리가 빠지지 않아 (공기 저항이 커져) 10명밖에 태울 수 없습니다. 네 명은 내리세요. 마닐라 사령부에는 그렇게 전했는데, 왜 14명이나 돌려왔을까?'라고 했다.

 

 

승객들은 모두 이제 와서 내리라고 해도 곤란하다는 얼굴로 누구 한 사람도 내리지 않았다. 그냥 잠시 시간이 흘렀다.

 

 

또 조종사가 나오더니 퉁명스럽게 '군속은 내리세요'라고 말했다.이 비행기는 「대1일본항공」의 징용기이지만, 누구를 남길 것인지, 이런 경우의 설명서에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잠시 후 신문기자인 듯한 두 사람이 일어나 '내리겠습니다'라며 불평 가득한 목소리로 내려갔다.(그들이 불평했던 것도 이해한다. 현지사령부의 방침으로는 신문기자 등 비전투원은 상황이 허락하는 한 내지로 송환하라는 방침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두 사람이 내려야 한다. 남은 12명은 모두 사관인 듯하지만 아무도 자진해서 내려오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급기야 또 그 조종사가 나와 '빨리 2명 내리세요'라고 초조하게 외쳤다.

 

 

그런데 어떻게 할까 생각했을 때, 승객 중에서 최선임인, 확실히 중좌나 소좌 이상인 사람이 「낮은 계급부터 내려라」고 명령했다(이상한 일이지만, 이 사람이 저 더운 마닐라에서, 해군의 감색 우비를 입고 있던 것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솔직히 드디어 내 차례가 돌아왔나 했다. 당시 나는 주계 중위였고, 나이로는 21세에 불과한 독자였다. 내려오겠다며 일어서야 한다고 온몸에서 밀어붙이는 의무감과, 다른 한편에선 여기서 내리면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라는 삶에 대한 집착과의 갈등이 온몸을 옥죄고 진땀을 흘리며 몸을 가누지 못했다.

 

 

기내는 무거운 침묵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승객 두 명이 서로 일어섰다. 두 사람은 출구까지 걸어가서 나란히 뒤를 돌아보며 자세를 바로 하고 다른 승객에게 경례하며 '저희는 병조장이니까 내리겠습니다'라고 한마디 한마디를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내려갔다. 둘 다 아내도 아이도 있을 텐데 어떤 마음으로 사지로 돌아갔을까.

 

 

홀가분한 독신자이면서, 주저한 것은, 「인간으로서」부끄러워 지금에 이르기까지 빚을 졌다. 젊은 나니에 중위가 된 것은 이런 국면에서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었지만 죽을 때까지 적을 죽이기 위해 살았지만 패전으로 망신을 당했다. 이는 유즈키의 부하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버리고 귀국했다는 자책감은 패전 후 50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곧 닥칠 죽음에 이르기까지 따라다닐 것이다.

 

 

4 라우렐 대통령의 권총

 

 

가까스로 날아오른 수송기는 낮게 날았다. 아래를 보면 끝없이 흰 계단식 밭이 이어져 있었는데, 그건 착각으로 마닐라에서 바로 해상으로 나와 거센 계절풍을 거슬러 북상했다.「흰 계단식 밭」이라고 보인 것은 파도머리로, 저 거친 파도에서는 불시착하면 살아날 가망은 전혀 없었다. 조종사는 적기를 감시하라고 주의를 줬지만 DC3의 작은 창문을 통해 감시하는 것은 무리였다. 다행히 적기를 만난 적도 없고 그러다가 긴장이 풀려 잠이 들었다. 비행기는 도중 타카오에서 급유해, 그 날의 오후 타이페이에 도착해, 승객은 모두 「우메야시키」라고 하는 훌륭한 요정에 숙박했다(타이페이에서 자란 동기 요시에 의하면, 「우메야시키」는 타이페이의 1류 요정으로, 그의 아버지는 일로 이곳을 자주 이용하고 있었다고 한다(그 무렵은 수교사로서 사용하고 있었던 듯했다).

 

 

시내를 걷지는 않았지만 도중에 본 가오슝 비행장 폭격 피해의 참상과 우메야시키의 나카이 씨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전쟁이 파국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보여줬다. 예컨대 대만인 중에는 적의 상륙이 임박했다고 보고 미국인의 크리스마스용으로 칠면조를 기르는 사람이 많다는 등의 얘기도 했다.

 

 

생각하면 우리의 타이베이 도착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우메야시키」에서 나와 같은 방을 쓴 것은 중년의 남자로, 머리를 포마드로 고정해, 전쟁터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름은 나카무라라고 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이쪽을 애송이로 보고 마음을 줬는지, 묻지 않고 지껄이는 이야기를 들으면, 마닐라의 시설부 엔지니어로, 「필리핀 정부의 라우렐 대통령과는 친해서, 그 사람으로부터 받은 것이다」라고, 검은 빛나는 자동 권총을 보여줬다.

 

 

일개 엔지니어가 아무리 괴뢰정권이라지만 왜 라우렐 대통령과 친한지 의아했다.

 

 

일본으로 돌아가는 이유는 신경통이 심해 내지로 전근하고 싶지만 마닐라에서는 허가를 받지 못해 본부에 부탁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꽤 수상한 이야기로, 이런 때에 어째서 엄격한 스크리닝을 뚫고 비행기를 탔는지, 수상쩍은 남자이지만, 시설부에는, 일의 성격상 여러가지 전력, 정통한 사람이 들어가 있을 것이고, 부 내의 통제도 해군의 전투 부대와는 다를까 하고 생각했다.

 

 

타이베이에는 2박하고 12월 26일 오후 찬바람이 부는 12월의 후쿠오카 기러기 둥지 비행장에 도착해, 비행기를 내려, 그날 밤 사이에 기차로 사세보에 도착했다.

 

 

이후 카와타나의 어뢰정 훈련소(후의 카와타나 돌격대)로 전근됐지만 종전 전인 20년 7월 돌아온 해군 공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름은 숨겼지만, 그 「우메야시키」에서 동숙한 남자가, 도망범으로 실려 있지 않은가. 이 해군공보를 여기에 실었다.

 

 

쇼와 20년 7월 8일 비밀 해군 공보

 

 

준사관 이상 도망 피고 사건 조사

 

 

18년 1월-20년 5월

 

 

(쇼와 20년 7월 3일자 해군성 군무국장이 각 청장에게 보낸 통달 사례에 든 것)

 

 

쇼와 20년 2월 2일 선고 사세보 진수부

 

 

마닐라 제103해군시설부에서 근무중, 신경통을 앓아서 치료를 위해 내지로 귀환하겠다고 상사에게 요구하고 거절당하자 전국이 긴박함에도 허가받은 것으로 위장해 내지시설본부 노무주임에 허가를 받은 해군기사 나카무라 미코토를 사칭해 12월 24일에 내지로 귀환해 3일간 직역을 맡음

 

 

(성명은 감췄다) 103시설부 서기

 

 

(징역 1년 6개월)

 

 

 

 

(후기)

 

 

미군의 함선 640여 척은 쇼와 20년 1월 7일 링가엔 만을 침공해 9일 상륙을 시작했다.

 

 

 

(주) 여담이지만, 이 호텔은, 전쟁전 「지멘스·클럽」이라고 불렀다. 마닐라 침공 때도 전화를 당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전후 상사에 들어가 뉴칼레도니아에 1년 동안 파견되어 쇼와 32년 귀국하는 길에 마닐라에 들렀는데, 그때 이곳에 묵었다. 13년 전에 내일의 삶을 걱정하면서 보낸 젊은 날들을 떠올리며, 무량한 생각이 들었다. 전후 몇 시부터인가, 이 호텔은 「Hotel Otani Manila」라는 이름으로 영업했다(일본의 「호텔·뉴오타니」와는 관계가 없다고 들었다). 로하스 대로를 사이에 두고 마닐라만을 바라보고, 전쟁 전의 미국대사관이나 미해군사령부, 미해군구락부등의 반대편에 해당하며, 마닐라의 중심 르네타 공원의 바로 옆이라는 절호의 지리적 이점을 타고,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시설임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있었던 것 같지만, 1995년(헤세이 7년) 12월 마닐라를 방문했을 때는 잔해만이 남아 있었다. 들어 보니 얼마 전 화재로 전소됐다고 한다. 전시의 추억은 또 하나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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