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우크라이나에 있는 중세시대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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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서부 끝자락 체르니우치 주에 있는 호틴(Хотин) 성채는 1325년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이 세운 군사기지였다.
드네스트르 강변에 자리 잡은 이 요새는 흑해까지 이어지는 요충지였다. 요새 내부에는 최대 천명 가량의 병력이 주둔 가능했고 과거에는 훨씬 큰 외성도 존재했다.
고대 키이우 루시 시절 정착지에 시작된 이곳은 이후 수많은 국가들이 뺐고 빼았기는 혈전을 거듭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화약병기의 발전 때문에 높은 성벽은 더 이상 방어에 적합하지 않았으나, 이 성채는 약 700년에 가까운 세월에 걸쳐 끝 없는 전투를 겪었다.
그 중 제일 유명한 건 1621년,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를 정복하기 위해 2만의 예니체리가 포함된 12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몽진한 오스만 2세의 투르크군과,
이를 막기 위해 나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우크라이나 코자크 연합군의 한달에 걸친 대혈전인 호틴 전투다. 당시 폴란드-코자크 연합군의 병력은 총 4만명 가량으로,
오스만 투르크군의 1/4 정도 밖에 되지 않았으나 호틴 성채를 거점으로 한 우주방어 라인 + 코자크들의 게릴라전 + 폴란드가 자랑하는 윙드 후사르들의 기동방어로 투르크군의 끝 없는 공격은 연달아 막아냈다.
그 결과, 3만의 코자크 지원군이 당도하였고 긴 전투에 질려버린 오스만 2세는 국경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협정을 맺고 물러난다. 각 진영은 서로가 승자라고 주장하였으나, 현재 역사가들은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철수한 오스만 투르크의 패배로 보고 있다.
자칫하면 투르크의 침공을 받을 뻔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는 이 승리를 아주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오스만 투르크의 위협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던 코자크들 역시 가용병력을 죄다 보내면서 승리에 일조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왕이었던 지기스문트 3세(Zygmunt III Waza)는 코자크들의 헤트만(Hetman, 총사령관)이었던 페트라 사하이다치니(Петро Конашевич-Сагайдачний)에게 금박을 입힌 마차와 다이아몬드가 박힌 검을 수여하며 두 국가간의 '영원한 우정'을 약속했다.
하지만 그 약속이 무색하게도 1648년, 폴란드 영주들의 가혹한 수탈에 시달리던 코자크들은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며 폴란드를 상대로 독립을 쟁취했다. 그 뒤로 양국은 서로를 배신자,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부르며 수백년간 서로를 증오하는 앙숙의 사이가 되어버렸다.
21세기 현재도 호틴은 우크라이나 영토로 남았다. 그리고 매년 그 전투를 기리는 행사를 거행했다. 비록 지난 몇 세기 동안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간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는 못했으나,
호틴 전투만큼은 서로에 대한 증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몇 안되는 두 국가의 우정을 보여주는 증표로 남아있다.
와 진짜 멋있다 한번 가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