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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욱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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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 규정 네 정치&시사 글이 아닙니다

삼국을 구성하는 고구려, 백제, 신라

 

이 중에 강국으로서 발돋음이 가장 늦었던 신라는 그 와중에서 수많은 눈치싸움과 실리외교, 전략적인 판단을 하며

 

주변의 고구려 백제 및 왜와 같은 세력들의 틈바구니에서 힘을 키웠는데 그 과정이 몹시 흥미롭다.

 

 

 

 

1.jp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당초에 '사로국' 이라고 불린 신라는 진한 12소국 중에 하나였다.

 

사로국이 있다가 망하고 나서 신라가 된게 아니라 사로국으로 쭉 가다가 이름만 바뀐것.

 

 

 

고대사다보니 사로국의 형성 시기는 여러가지 이론이 있지만, 후대에 작성된게 아닌 당대기록인 '정사 삼국지' 에

 

"외국에 사로국이라는게 있다" 라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에, 

 

최대한 형성 연대를 늦게 보더라도 정사 삼국지가 쓰여진 기원후 3세기 경에는 적어도 사로국이 존재했다는게 확실시 된다.

 

 

대체로 학계에서는 사로국의 연대에 대해서 BC 200년~ 기원후 200년대 근처로 왔다갔다 하는편.

 

 

 

 

 

 

 

 

1.pn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2.PN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진한의 여러 소국들 중에 왜 하필 사로국이 급성장 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유력한 견해는 경주 황성동을 비롯한 경주 여러곳에서 상당한 규모의 제철 시설이 발견 되었다는것과

 

 

또한 경주 주변의 포항, 울산, 경산 등등 다른 진한 소국이 있었을 곳의 여러 철기 유적도

 

다른 나라에서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흡사 '공산품' 마냥 크기 및 발전 형태도 거의 유사하다.

 

 

 

즉 사로국이 제철기술로 이름을 날렸고, 이렇게 만든 여러 무기를 다른 진한 소국에 공급하는 위치에 있다보니

 

이를 바탕으로 국력을 키웠다는것.

 

 

 

그 외에 경주라는 곳이 지리적으로도 동해안 교통로와는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고, 

 

낙동강 교통로도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는 위치라는 점도 있었다.


 

 

 

 

 

 

 

1.pn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빠르면 기원전 2세기, 늦으면 기원후 3세기 경에는 어느정도 구체적인 모양새가 갖춰진 '사로국'은

 

 

4세기 경부터는 슬슬 바로 '옆동네'의 작은 소국을 병탄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국제정치에 어느정도 끼어들기 시작한다.

 

 

그걸 보여주는게 바로 '포상팔국의 난'

 

 

 

삼국사기에는 이 '포상팔국의 난' 이 209년 경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여러 교차검증이나 고고학적인 분석을 통해 보면 이건 불가능하고,

 

 

일반적으로 300년대 초반 혹은 중반 정도로 여겨지고 있다. (400년대경까지 늦추는 경우도 있으나 소수설)

 

 

 

포상(浦上) 즉 강이나 바다를 낀 포구의 마을 국가 8국이 연합을 맺고,

 

현재 김해의 '금관국' 혹은 현재 함안군인 '안라국'을 다구리로 쳤고,

 

 

이에 금관 혹은 안라국에서 사로국에 구원을 청하자 사로국에서 지원군을 보내 

 

 

1대8로 맞짱을 떠 이들 모두를 패배시킨 사건이었다.

 

 

어디까지나 구원해서 패배시키는데만 중점을 두었지 아직 사로국이 이들 지역까지 복속할 형편은 안되어 점령까진 하지 않았지만,

 

 

진한 소국이었던 사로국이 외부까지 힘을 투시할 수 있는 '국가' 수준으로 성장했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1.pn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2.PN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문제는 신라가 이제 좀 배럭에서 마린 메딕 좀 뽑아서 적 앞마당 견제용으로 

 

어느정도 외부에 힘을 투시가 가능한 4세기 쯤에 될때

 

 

옆의 백제와 고구려는 이미 테크트리가 훨씬 더 빨라서 시즈 탱크에 배틀 크루저 뽑는 최전성기 찍는 상황이었다는것이다.

 

 

 

 

 

 

 

1.pn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더군다나 왜와 관계가 있던 백제, 고구려와는 달리

 

신라와 왜는 그야말로 원수나 다름 없었다.

 

근초고왕 - 광개토대왕과 기간이 겹치며 백제와 고구려의 패권이 계속 바뀌는 격동기의 내물 마립간 시절엔

 

 

허구한날 왜군이 쳐들어왔고,

 

심지어 기록에 따르면 신라군이 정면대결을 피하고 복병과 지리를 이용해 싸우며 격퇴하는등 전면전을 피하는 모습도 보인다.

 

즉 왜군이 그 정도로 대규모 군세였다는것.

 

 

 

 

393년에는 왜군이 수도 금성을 5일간 포위까지 하기에 이른다.

 

그래도 이때는 잘 막아내고, 역으로 퇴각하는 왜군의 뒤를 쳐 섬멸 하는등 선전했지만,

 

 

 

400년에는 백제 - 가야 - 왜가 연합을 먹고 3개 세력 연합군이 신라를 치는 막장스러운 상황까지 발생한다.

 

 

그동안 왜군을 잘 막아내었다고 해도 이건 무리였고, 고구려에 지원을 청해

 

광개토대왕이 이끄는 5만 대군의 도움을 받아 구사일생 하게 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고구려가 무상으로 신라를 도와준 것은 아니었다.

 

대신 사로국은 이를 계기로 최전성기의 고구려의 사실상 속국으로 떨어지게 되고,

 

아예 내물 마립간이 직접 고구려에 가서 조공을 바치고 인사를 하는 상황이었다.

 

 

이후 사로국은 수십년 이상 고구려의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에 있게 된다. 

 

그냥 조공만 바치고 끝나는 수준이 아니라, 사로국 내부에 고구려군이 항시 주둔해 있었을 정도. 

 

일단은 보호 명목이지만 까불면 뒤짚어버리겠다는 경고의 의미도 숨어 있었다.

 

 

 

image.png.jpg

 

 

 

특히 광개토대왕의 지원군이 온지 2년뒤에 즉위한 '실성 마립간'은 이런 상황에 가장 적나라하게 놓인 편이었다.

 

 

실성 마립간은 사로국이 고구려와 동맹을 맺었을때 볼모로 고구려에 가서 생활하다가 돌아온지 1년만에 왕이 되었다.

 

 

당시 선왕인 내물 마립간에겐 친아들이 3명이 있었으나 

 

'나이가 어리다' 는 이유로 사로국에 돌아온지 1년 밖에 안되어 별 세력도 없던 실성이 마립간이 되었던 것.

 

 

 

 

 

즉 이건 고구려가 사로국의 계승에 뒤에서 끼어들어 

 

한때 고구려 볼모 생활을 한지라 자기들이 조종하기 쉬울 것 같은 실성을 대신 앉힌 가능성이 크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실성 마립간이 무능한 사람은 아니었고, 백제와 왜의 침입을 직접 친정해서 막아낸 업적도 있다.

 

 

그러나 이런 업적이 있는 실성 마립간도 고구려가 마음을 바꿔 먹자 바로 희생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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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갑자기 사로국의 내정에 개입해 실성 마립간의 반대파인 '김눌지' 를 후원하고

 

 

고구려의 후원을 받은 김눌지는 실성을 제거하고 자신이 '눌지 마립간' 으로 즉위한다.

 

 

 

당시 고구려는 '복호' 라는 신라인을 인질로 잡고 있었다. 그런데 복호는 눌지 마립간의 동생이었다.

 

동생을 손에 쥐고 있으면 눌지 마립간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여겨 실성을 버리고 눌지를 왕위에 앉힌것.

 

 

 

때문에 고구려의 후원을 통해 즉위했다고 해도 눌지 마립간 역시 수틀리면 갈아치워질 수 있는 신세라

 

마냥 고구려에 호의적이진 않고, 대신 여건이 좋지 않다보니 조용히 힘을 기르는데 집중했다.

 

 

 

 

 

 

 

 

 

1.jp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그런데 눌지 마립간은 꽤나 형제들을 아끼는 성격이었고,

 

고구려에 볼모로 잡힌 동생 복호, 그리고 왜에 볼모에 잡힌 동생 '미사흔'을 항상 그리워했다.

 

(유독 이 형제만 볼모로 많이 보낸건, 

 

선왕인 실성이 눌지 세력을 약화 시키려고 일부러 볼모로 타국으로 많이 보내서 죽이려고 그랬다는 의견이 강하다)



 

 

때문에 '박제상' 이라는 신하에게 도움을 구했는데, 먼저 박제상은 고구려로 가서 장수왕을 설득해 복호를 빼내온다.

 

단 말로 설득했다는건 삼국사기의 기록이고, 

 

삼국유사에서는 몰래 빼온 것이고 그 와중에 고구려군의 추격을 받아 죽을 뻔 했으나 도주극 끝에 겨우 탈출했다고 한다.

 

 

 

그렇게 복호를 빼온 박제상은 이번에는 왜로 향했다.

 

신라를 배신하고 왜에 항복하러 온것처럼 위장한 박제상은 기회를 틈타 미사흔을 탈출 시키고,

 

본인은 시간을 끌기 위해 남았다가 잡혀서 잔혹한 고문을 받고 화형 당해 죽었다.

 

 

 

 

 

 

 

1.PN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굉장히 드라마틱한 일화인데, 해당 일화는 삼국사기 뿐만 아니라 일본서기에서도 교차검증되는 이야기다.

 

즉,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1.jp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인질을 빼오긴 했으나 눌지 마립간은 당장 강대국인 고구려와 적대하려고 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친족이 그리워 어쩔 수 없이 실례했다는 식으로 최대한 비위를 맞추며 기회를 엿보며 때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433년 7월, 백제의 비유왕이 30년 전의 원한을 잊고 같이 손을 잡아 고구려에 대항하자는 의사를 표시한다.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시달려 다른 방법이 없다고 여겨 옛 적과 동맹을 맺기로 한것이었다.

 

 

 

이에 눌지 마립간이 화답하여 '나제동맹' 이 결성되었으나,

 

나제동맹이 당장 결성된 이후에도 눌지 마립간은 당장 고구려를 적대하진 않았다.

 

 

앞으로는 고구려에 숙이며 뒤로는 백제와 손을 잡으면서

 

오히려 10여년 넘게 고구려의 동생 나라를 자처하며 연신 굽실거리며 최적의 때를 기다렸다.

 

 

 

 

 

1.PN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일본서기에서는 464년이라고 하지만 학계에서는 대략 450년경 쯤으로 여겨지는 시기,

 

당시 신라에 주둔해 있던 고구려인 한명이 잠시 고구려로 돌아가며,

 

자기 말을 모는 말잡이로 신라인을 써먹었다.

 

즉 휴가로 돌아가는 고구려 사람이 신라인을 자기 사적인 말잡이로 부하처럼 써먹은 행위였다.

 

 

 

이때 이 고구려 병사는 "엌ㅋㅋ 느그 나라 곧 우리나라에게 따먹힐 날이 멀지 않았다ㅋㅋ" 며 입을 털었고,

 

이 말을 들은 말잡이는 배가 아프다고 잠시 뒤에 남은 뒤 도망쳐 

 

눌지 마립간에게 이 말을 전했다.

 

 

 

말을 들은 눌지 마립간은 슬슬 때가 왔다고 여겨 소리쳤다.

 

 

"사람들이여, 집안에서 기르는 수탉을 죽여라!(人殺家內所養鷄之雄者!)"

 

 

 

이 말을 들은 사로국 사람들은 지체없이 신라에 주둔해 있던 고구려 병사를 모조리 때려죽였다.

 

장기간 신라에 고구려군이 체류해 있다보니 당연히 현지 여론은 안좋을 수 밖에 없었고,

 

마침 고구려인이 사적으로 노비처럼 써먹은 신라인+그 신라인이 알려준 고구려 병사의 폭언 등등으로 반감이 극에 달하자

 

이를 이용해 한번에 고구려군을 축출해버렸다.

 

 

 

이를 기점으로 50년만에 사로국은 고구려의 속국 신세에서 벗어나게 된다.

 

 

훗날 백제 비유왕이 죽었을 당시의 혼란을 이용해 고구려 장수왕이 쳐들어오자, 지원군을 보내 격퇴하면서

 

눌지 마립간은 군사적으로도 고구려에 적대할 것을 확실하게 표시하게된다.

 

 

이후 나제동맹은 최소 50여년은 끈끈하게 유지되며 우주방어 태세로 고구려의 침입을 막아내게 된다.

 

 

 

 

 

1.PN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신라가 고구려에 저항한지 50여년이 지난 뒤, '지증왕' 이 즉위한다.

 

 

 

1989년, 포항의 한 사람이 자기 밭에 있어서 농사를 방해하던 큰 돌을 캐내고

 

캐낸 김에 그 위에다 빨래를 올려서 빨려고 닦다보니 글자가 새겨져 있어

 

 

알고보니 이게 지증왕 시기의 비문이었다.

 

 

 

내용은 상속을 둘러싼 분쟁에 지증왕을 포함한 '일곱왕'이 의논하여 판결을 내려준 당시의 판례문이었다.

 

여기에 따르면 지증왕 당시에도 신라는 아직 왕의 권위가 일방적이지 않았고, 

 

6부 체제에서 대표라는 느낌과 부족협의제 느낌이 강한걸 볼 수 있다.

 

 

 

이게 503년에 만들어진 물건으로, 지증왕 재임시절의 초반부에 해당한다.

 

 

 

 

저런 상황 속에서 지증왕 시기에 이르러 사로국은 

 

그전까지 이런저런 표기와 뒤섞여서 혼동되게 사용되던 '신라' 라는 이름으로 확실하게 국호를 정했다.

 

여기에 '왕' 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왕권을 키우고, 동시에 군현제를 정비하며

 

신라를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데 큰 공훈을 세웠다.

 

 

 

 

 

 

 

 

1.jp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한편 이 무렵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이사부' 다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 수 없지만, 

 

지응왕 시기 대략 10대 후반 ~ 20대 초반으로 짐작되는 어린 나이부터 가야와의 전쟁에서 공훈을 세웠고,

 

 

역시 20대 중반쯤으로 짐작되는 젊은 나이에 지금의 강원도 삼척시인 실직주(悉直州)의 군주(軍主)라는 자리를 맡았다.

 

나이 약관의 젊은이가 중요한 변방 요지 한 지역의 군주직을 맡은것이다.

 

 

 

이후 몇년 뒤엔 현재 강원도 강릉인 '하슬라주'의 군주직을 맡고,

 

 

현재의 울릉도인 '우산국'을 배를 타고 넘어가 점령하면서, 울릉도 지역을 최초로 한반도 왕조에 포함 시키게 되었다.

 

 

 

 

 

 

 

1.jp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우산국 점령 등으로 커리어를 쌓던 이사부는 10여년 정도가 지난 법흥왕 시절,

 

결정적인 공훈을 세우게 된다. 바로 영남의 대세력 '금관가야' 를 사실상 복속시킨 것이다.

 

 

 

당시 지증왕 - 법흥왕 시기를 거치며 국가적 포텐이 터지던 신라가 가야를 다 집어사킬 기세가 되자,

 

여기에 두려움을 느낀 '아라가야' 는 왜를 끌어들여 신라를 저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사부가 3천 병력을 이끌고 오자 그 위세를 보고 왜군을 이끌던 오미노케누(近江毛野臣)는 싸우지도 않고 퇴각했고,

 

이사부는 돌아오는 길에 금관국을 쳐서 약탈하고 포로를 잔뜩 끌고와 금관국은 이로 인해서 사실상 끝장이 나고 만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금관국은 신라에 항복을 했고, 이로서 신라는 영남의 절대적인 세력이 되고

 

진정한 신라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항복한 금관국의 마지막 왕 구형왕(仇衡王)은 남은 기록은 없으나,

 

그 자손들이 신라에서 한가닥 해먹은 것을 보면 크게 탄압을 받지는 않았던것 같다.

 

이 구형왕의 후손이 다름아닌 '김유신' 이다.

 

 

 

 

 

 

 

 

1.jp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540년, 드디어 그 유명한 진흥왕이 즉위한다.

 

 

단, 진흥왕은 겨우 7살의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즉위 초기에는 태후가 정치를 맡았으며

 

여지껏 혁혁한 공을 세운 이사부가 현재의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병부령(兵部令)이 되어 군부의 1인자가 되었고,

 

사실상 태후-이사부의 2인 체제로 정치를 굴렸다고 해도 무방하다.

 

실제로 창녕 척경비에서는 '과인(진흥왕)이 어릴 때 왕위에 올라 정치를 보필하는 신하에게 맡겼다' 는 언급도 보인다.

 

 

 

 

즉 어떤식으로 보면 지증왕 - 법흥왕 - 태후&이사부 - 진흥왕 순서라고 봐도 되는것.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한명도 빠짐없이 명 지도자들이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1.PN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548년, 가야의 사주를 받은 고구려가 현재 경기도 오산시인 '독산성' 의 백제군을 공격해왔다.

 

 

당시 백제 성왕은 나제동맹에 의거하여 신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신라는 3천 병력을 파견해 백제를 도와주었다.

 

 

백제-신라 연합군은 이 '독성산성 전투'에서 고구려를 그야말로 개발살을 내버리게 된다.

 

 

고구려는 이때 입은 남부의 전력 피해가 적지 않은지, 몇년뒤 나제 연합군의 대규모 침공때, 아무리 돌궐의 침입이 있었다지만

 

그야말로 무주공산 수준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고구려와 원한이 깊은 백제 입장에서도 뜻깊은 승리였고,

 

과거 고구려의 속국 신세 이후로 거의 100여년이 흘러 드디어 제대로 한방 먹여준 신라 입장에서도 의미가 깊은 승리였다.

 

 

 

 

 

 

 

1.jp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백제 성왕

 

 

 

백제와 고구려는 서로 왕과 왕을 죽인 불구대천의 원수.

 

신라의 도움을 받은 이 승리로 성왕은 크게 자신감이 올라


550년 1월, 이번에는 백제군을 이끌고 역으로 고구려를 쳐 현재 충청북도의 '도살성'을 을 함락시키게 된다.

 

 

문제는 백제는 이때 많이 힘이 약해진 상태였고 

 

고구려는 여전히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는것,

 

그리고 고구려를 물리친건 신라의 지분이 컸다는 사실이었다.

 

 

 

불과 2개월 뒤 550년 3월, 고구려군은 대규모로 반격해왔고, 백제는 바로 위기에 빠지게 된다.

 

 

 

 

 

 

1.pn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고구려군은 백제에게 빼앗긴 도살성을 치는 한편 내친김에 근처의 '금현성' 까지 이중으로 공격해왔다.

 

금현성은 순식간에 함락되었고 도살성도 무너지기 직전,

 

 

이때 이사부가 이끄는 신라 지원군이 다시 한번 등장했다.

 

이번에는 연합군이라고 하기도 어렵고 사실상 신라 단독으로 고구려와 전쟁을 펼쳐,

 

신라군은 백제가 쩔쩔매던 고구려군을 박살을 내버리게 된다.

 

 

 

신라군은 남한강 상류 유역까지 고구려군을 추격하며 이 지역을 장악했고,

 

고구려군이 물러간 뒤 병사 1,000명을 주둔시켜 성을 증축했다.

 

즉 자연스레 이 지역을 신라가 먹게 되었고, 백제 성왕도 여기에 대해서는 지적을 하지 못했다.

 

 

 

 

 

어차피 신라가 먹지 않았으면 백제 단독의 역량으로는 고구려에게 뻇길 지역이었고, 

 

고구려와 싸우기 위해선 신라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

 

 

여하튼 신라는 이를 통해 영남의 지방세력을 떠나 남한강 유역까지 미치는 세력으로 발돋음 하게 되었다.

 

 

 

 

 

 

5.jp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현 충북 단양군에 세워진 단양 신라 적성비.

 

신라군이 도살, 금현성 전투에서 승리한 뒤 세운 비로, 이사부가 참전장수 이름 가장 첫머리에 나와 

 

고구려를 물리친 신라군의 최고 사령관임을 알 수 있다.

 

 

 

 

 

 

 

 

 

1.pn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551년, 백제-신라 연합군은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당시 북방에서 강력한 세력을 떨치던 돌궐이 고구려를 쳤고, 

 

이에 고구려는 장군 고흘高紇이 병사 1만명을 거느리고 돌궐을 막으러 나섰다.

 

침공 자체는 어떻게든 막아냈지만, 당시의 고구려에겐 북으로 돌궐을 상대하며 남으로 백제-신라 연합군을 상대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추풍낙엽 신세가 되어 백제는 6군을, 신라는 10여군을 차지하게 된다. 

 

이 전쟁은 이제 막 친정을 시작한 20대 초반, 혈기왕성한 진흥왕에 의해서 주도 되었는데,

 

 

 

이전까지 전쟁에서 명성을 떨치던 이사부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과거 가야에서 항복한 금관가야왕의 아들, '김무력' (김유신의 할아버지) 등이 주축이 되었는데,

 

정황상 친정을 시작한 진흥왕이 권위를 위해 너무 명성이 깊은 이사부를 한쪽으로 빼두고 자신이 키우는 인물들을 중용한듯 싶다.

 

 

 

 

 

이때 백제는 76년만에 옛 고토를 회복하게 되었고,

 

당시의 고구려로서는 양면전선을 유지할 힘이 부족했다.

 

 

사람들에게 인식이 덜하지만 사실 이때는 고구려에 있어 정말로 큰 위기였다.

 

막말로 나제동맹군이 끝을 보려고 했다면, 최소로 잡으면 고구려 수도 평양성은 날아갈 수도 있는 정도고 

 

더 크게 잡으면 고구려의 존망이 걸릴 수도 있었다.

 

 

 

 

 

 

 

5.jp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 성왕은 신라측에 계속 고구려를 치길 원했던것 같다.


저 예전 광개토대왕 때 백제 아신왕이 얼마나 큰 굴욕을 당했던가. 

 

마음 같아서는 고구려왕을 사로잡아 무릎 꿇여 굴욕을 주어도 분이 풀리질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백제 최전성기의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근초고왕 시절 황해도까지 영향이 미쳤으니 

 

지금의 성과 만으로는 아직 부족한 형편이었다.

 

 

 

 

 

그런데 그건 백제의 사정이고 신라 진흥왕은 무리를 해서 고구려와 끝을 보려는 생각이 없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가 고구려와 싸움을 지속하길 원할때

 

진흥왕은 오히려 고구려에 사람을 보내 정전 협상을 제의했다고 한다.

 

 

 

진흥왕 입장에선 무리하게 전쟁을 계속하면서 고구려를 최소 요동으로 쫒아내고 백제와 동서로 땅을 차지한들, 

 

평양 등을 차지할 백제에 비해 실익이 적었을거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고구려 입장에서도 불구대천의 원수인 백제 대신, 신라야 예전에 만만하던 놈에 요새 좀 부담스러운 애들 정도로

 

엄청 친하다고 할것까진 없어도 백제 수준의 원한은 없는지라 손을 잡기도 편했다.


 

 

 

 

이렇게 고구려와 신라가 막후 협상을 펼치고, 

 

백제 단독으로는 북상이 어려운 형편 탓에 나제 연합 VS 고구려 전투는 이쯤에서 마무리 된다.

 

 

 

 

 

 

 

 

1.pn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1.pn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전설이다...

 


 

 

 

이후 진흥왕은 점령한 북방 영토를 직접 찾아가는 '순수巡狩' 를 하고 비석을 세웠다. 

이중 황초령비는 신라가 진흥왕 시절 함흥 평야와 개마고원 일대까지 진출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함흥은 서라벌에서 직선거리로만 480km는 떨어진 지점에 있다.

 

 

신라는 이후 통일 신라 시기에도 여기까지는 못 올라갔고,

 

심지어 신라 뒤의 왕조인 고려시대 때도, 말기 공민왕 시절 이전까지는 이 지역은 실효지배를 한게 극히 드물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경주 주변의 신라를 생각하면 너무나도 북쪽이라,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 학자들은

 

"신라 따위가 여기까지 가다니... 믿을 수 없다"

 

 

 

는 식으로 이 순수비가 후대에 만들어진 쌩구라,

 

 

혹은 훨씬 남쪽에 있던걸, 훗날 고려의 윤관이 여진정벌을 할때 "원래 여기는 우리 민족 땅이었다" 는 프로파간다를 위해

 

남쪽에 있던 비석을 여기로 끌고와서 박았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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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jp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그런데 1929년, 그 황초령비 보다도 북쪽인 마운령에서 진흥왕순수비가 발견되며

 

황초령비 위작설, 윤관 위치 주작범설 등은 결국 싸그리 들어가게 된다.


 

 

이 마운령비는 조선시대 한백겸이 확인했으나 오랜 세월 동안 위치가 잊혀져 반쯤 전설처럼 되었고,

 

존재 자체가 의심되었으나 1929년 최남선이 현지 답사 결과 진흥왕 순수비 임을 밝혀내었다.

 

(현지 주민들은 남이장군 비석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황초령비와 내용이 거의 비슷하여 동일한 시기에 세워졌다고 여겨진다.

 

 

 

 

9.jp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마운령비가 있는 위치가 얼마나 북쪽이냐면,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보다 훨씬 북쪽이며,

 

심지어 압록강 너머에 있는 고구려의 옛 수도 국내성과 위도가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고구려에서 독립한지 100년만에 신라가 자력으로 여기까지 간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밝혀진것중 최대치가 여기까지인거지, 실제로는 더 북쪽에 신라비가 있을수도 있다.

 

애초에 마운령비도 확인된게 100년도 안된 물건이고, 현재도 신라비가 계속 밝혀지니만큼, 

 

만약 통일이 되서 현지조사가 활발해지면 더 북쪽의 신라비가 나올 가능성이 없는것도 아니다.

 

 

여하간에 이 순수비는 북한에 있는 몇 안되는 신라 관련 유물로 남아 있다.

 

 

 

 

재밌는것은 황초령비의 내용에 따르면 '이웃 나라가 신의를 맹세하고 화사(和使)가 서로 통하여 오도다' 라는등,

 

고구려가 자기 뒷마당을 먹어버린 신라에 대해 항의를 하지 않고 조용히 축하해줬다는 것이다.

 

 

 

당시의 고구려로서는 상황도 어지럽고 북방전선도 고조되는 상황이라 신라의 눈치를 봐야했고,

 

그래서 당장 굴욕을 참고 자기 땅을 먹은 신라를 오히려 축하하며 최대한 비위를 맞춘것이다.

 

 

이후 고구려는 신라를 견제할 수 있는 후방의 왜에 이전보다 더 사람을 많이 보내는등 신라에 대한 의식이 훨씬 강해진다.

 

 

또 훗날 '온달 전설' 등 신라와의 전쟁 이야기도 나오는데, 

 

이때는 참다가 시간이 지나서 신라와 전쟁에 나서 해당 지역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단, 그렇다고 진흥왕 시기 신라가 저 북방에 땅만 찍고 돌아갔다고 하기에는

 

순수비를 세웠다는것 자체가 왕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것이므로, 

 

최소한 진흥왕 당대에는 해당지역 치안이 왕이 행차해도 무방할 정도로 확실히 장악되었다는 이야기고

 

 

순수비의 내용도 지식인을 대동해 지역을 교화하려고 했다는 내용이라 진지하게 해당 지역을 통치하려고 했던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너무 먼 곳이라 결국은 지켜내지 못했지만, 

 

최소한 진흥왕 당대 몇십년간은 상당히 진지한 신라의 영역이었다.

 

 

 

 

 

 

 


 

여하간에 백제와 신라 연합군의 대규모 진군이 있던 551년에서 2년이 지난 553년,

 

 

한강 상류를 차지했던 신라는 이윽고 한강 하류까지 차지하게 된다.

 

 

 

 

 

 

 

1.PN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이 과정에서 신라가 백제를 통수치고 기습하여 전투를 통해 해당 지역을 차지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심지어 교과서에도 은근히 그런 늬앙스로 써져 있을 정도.

 

 

그러나 실제 기록을 살펴보면, 신라가 백제를 기습하여 공격해서 전투를 통해 해당 지역을 차지했다고 볼

 

직접적인 근거는 없다.

 

 

 

 

 

 

 

1.PN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걍 다른걸 떠나서 애초에 사서에서는 전투에 대한 내용 자체가 나오질 않는다.

 

전투 이야기가 없으니 배신이나 통수, 기습에 관한 이야기도 애초에 막연한 이야기일 뿐이다.

 

신라와 백제의 전면적인 전투라면 굉장히 큰 사건인데,

 

하다못해 군사를 편제하거나 하는등 전투를 암시하는 내용조차도 없다.

 

 

 

 

백제와 신라 중에 백제 쪽 시각이 더 많이 반영된 일본서기에서는 그냥 백제가 버려서 신라가 먹었다고 나와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신라가 '거두었다' 고 나온다. 보통 공격에서 차지할때는 공취攻取했다 라고 하는걸 생각하면, 

 

거두었다取는 것은 다소 미묘한 표현.

 

 

 

 

여기에 대한 백제의 반응도 당장 항의하거나 분노한게 아니라, 성왕이 자기 딸을 신라에 시집을 보냈다는 것.

 

당장의 배신과 격렬한 군사적 투쟁이 있는 사람치고는 희한한 반응 아닐 수 없다.

 

 

 

 

때문에 지방세력들에게 군사를 받아 병력이 구성되는 백제군의 특성상, 전투가 끝나면 그 병사들은 다시 돌아가야 하므로

 

백제가 한강 유역을 확실하게 굳혀놓기 어려웠다는 의견이 있다.

 

아닌게 아니라 백제라는 나라는 비단 성왕 시절이 아니더라도 근구수왕, 동성왕, 무령왕 시절 여러차례 고구려 영토를 차지하고도

 

딱히 결정적인 패전도 없이 시간이 지나면 해당 지역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꽤 잦았다.

 

 

 

 

성왕 입장에선 당장은 한꺼번에 먹긴 부담스러워도, 자기가 오랜 시간 동안 걸쳐서 먹으려고 침 발라놓은걸

 

잠시 자리 비운 사이에 신라가 먹었다고 하면 원망이 생길 수는 있어도,

 

 

 

최소한 대중들이 생각하는 '신라가 백제군을 기습하여 무력으로 해당 영토를 강탈' 했다와는 어감이 차원이 틀리다고 볼 수 있다.

 

 

 

원래는 이런 주장을 전쟁사 연구자인 임용한 교수가 먼저 했으나,

 

이후에는 고대사 주류 역사학계의 거물인 노태돈, 주보돈 교수등이 19년에 내놓은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에서도

 

백제가 잠시 해당 지역을 포기한걸 신라가 차지했다는 식으로 언급하고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일단 1차 사서에 전투 관련 기록 자체가 없다는것이다.

 

 

 

 

 

 

 

6.jp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여하간에 백제 성왕은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한 후 자기 딸을 시집보내며 나제 동맹을 오히려 강화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동시기에 왜에 사람을 보내 신라를 치는데 지원을 구하며 배신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편 진흥왕은 이후의 결과로 놓고 보면 신라 역사에서도 1,2순위에 꼽힐 명군이지만, 

 

당시의 입장에서 보면 불패의 명장 이사부를 뒷전으로 밀고 새파란 장수들을 등용하는 젊은 풋내기 군주에 지나지 않았을테고,

 

진흥왕 본인의 권위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신라 조정 내에 약간의 혼란이 있었을 수도 있으니, 

 

성왕 입장에선 절호의 기회로 보였을 것이다.

 

 

 

 

 

 

당시 백제 귀족들은 신라와의 전쟁을 반대했으나, 성왕은 자신의 의지로 전쟁을 밀고 나갔다.

 

이 부분은 백제의 '한강유역 포기설' 에도 힘이 실리는데, 

 

 

 

귀족들의 힘이 강한 백제에서 당시 귀족들은 성왕의 확장 정책을 애초에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았던것.

 

점령한 지역을 유지하려면 장기간 군대 주둔 및 내지의 인력을 현지로 이주하는 작업등이 필요한데

 

귀족들이 협조하지 않으면 성왕 입장에선 한강 유역을 유지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어쨌든 성왕은 귀족들의 반대를 씹고 전쟁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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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백제군은 초반에는 기세좋게 밀고 나갔다. 

 

성왕의 아들 태자 창이 이끄는 군대는 초전에서 승리했고, 신하들이 말리는데도 혈기에 취해 신라 깊숙이 더 진군하였다.

 

 

 

한편 초기에 당하던 신라는, 이윽고 북방에 있던 김무력이 주력군을 이끌고 남하하며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이 부대는 고구려를 막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신라는 고구려와 밀약을 맺었으므로, 

 

국경을 비우고 올인에 가까운 지원을 할 수 있었던것.

 

 

 

 

한편 백제 성왕은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깊숙이 진군한 태자에게 합류하려고 했으나, 도중에 이 대규모 군세를 만나버렸고

 

 

 

결국 사로잡혀서 목이 잘리고 만다.

 

 

 

 

 

얼마 후 苦都가 明王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明王이 “왕의 머리를 奴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苦都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奴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다른 책에는 “明王이 胡床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谷知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明王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苦都는 머리를 베어 죽이고 구덩이를 파 묻었다다른 책에는 “新羅가 明王의 頭骨은 남겨두고 나머지 뼈를 百濟에 예를 갖춰 보냈다. 지금 新羅王이 明王의 뼈를 北廳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都堂註 004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사로 잡은 성왕에게 굴욕을 주기 위해 노비를 시켜 목을 베었다는 말도 있으나,

 

당장 기록을 봐도 목을 베는 도도가 예를 표하는 모습도 있고,

 

보통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스스로를 노예로 낮춰서 표하는 일도 드문일도 아니었기에 실제 노비는 아니었을거라고 여겨진다.

 

 

 

 

이때 도도는 "우리나라(신라)에서는 맹세를 어기면 국왕이라고 해도 천한 노비에게 죽는다." 고 하는데,

 

 

보통 백제가 신라를 통수쳤다는 인식이 있으나 오히려 기록을 보면 신라인들이 성왕에게 배신당했다는 늬앙스를 보인다.

 

일본서기가 신라보다는 백제의 시각이 더 반영되었다는걸 생각하면 더욱 흥미로운 부분이다.

 

 

 

또한 죽은 성왕의 머리통을 신라에서 사람들이 오고가는 계단 아래에 묻어버려 굴욕을 줬다는 말도 있으나,

 

이건 일본서기에서조차 본문에 포함 안시키고 주석으로 "다른 책엔 그런말도 있다." 라고 언급하여

 

덧붙이는 이야기 정도로 처리한다. 정황을 보면 신라에 대해 원한이 큰 백제인들 입장에서는 그런 말이 있었다, 정도로 보인다.

 

 

 

왕이 죽었으니 백제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백제군은 처참하게 대패를 당했으며,

 

군사를 이끌던 태자 창 역시 목숨을 잃을 뻔 했으나 활 잘 쏘는 일본 무장의 도움으로 겨우 구사일생 하게 되었다.

 

 

 

 

 

 

6.jp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백제를 물리친 진흥왕은 562년, 오랜만에 이사부를 재기용하여

 

대가야를 비롯한 나머지 가야 소국을 쓸어버리는 장면에 착수한다.

 

 

 

성왕의 뒤를 이은 백제 위덕왕은 이를 제지하려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에도 무리하게 출병한 전투가 처참하게 실패로 끝남에 따라 군사적인 타격외에 정치적으로도 심대한 타격을 입어

 

이를 저지하기 쉽지 않았다.

 

 

 

가야는 다급한 김에 왜에 지원을 요청했다.

 

 

 

 

 

 

 

1.PN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이때 왜군의 장수 중, 부인이 가야 사람이었던 '코모츠메베노 오비토 토미' 는 

 

군사작전이 들어있는 계획서를 가지고 처갓집을 방문했다가 이 계획서를 땅바닥에 분실했고,

 

 

이 작전계획서를 얻은 신라군이 백제, 가야, 왜가 또 연합하려고 한다는 정보를 착수하고 바로 공격에 나서게 된다.

 

 

일단은 왜군은 초전에서는 몇번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특히 '니에' 라는 장수가 제법 무용이 있어 여기저기서 싸움을 잘했는데, 병법에는 능하지 못해

 

신라군이 작전을 쓰자 바로 사로잡히게 된다.

 

 

이후 신라군은 백제군+왜군을 합쳐 최소 1,000여명을 쳐죽였고, 

 

한명을 제외한 나머지 장수를 모조리 사로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신라 장군은 니에의 부인을 끌고 와서 니에에게 "네 목숨과 네 마누라 목숨 중에 뭐가 더 소중하냐, 하나만 골라라." 했고,

 

이에 니에는 "당연히 내 목숨이 제일 중요하지 여자 하나때문에 목숨을 내놓겠습니까" 대답했다.

 

 

이에 신라 장수는 니에는 풀어주고 니에의 마누라는 들판에서 겁탈하고 풀어줬다고 한다.

 

부인이 풀려나고 니에는 멋쩍어하며 사정이 어쩔 수 없었다고 말을 하려고 했으나,

 

부인은 니에를 몹시 원망하여 "날 팔아먹고 무슨 명목으로 만나려고 하는가." 하며 거절했다고 한다.

 

 

 

 

 

 

 

 

5.pn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또 아키나라는 다른 인물은 신라 장수가 강제로 엉덩이를 벗기고 그 엉덩이를 일본 쪽으로 향하게 하고

 

"일본 대장은 엉덩이나 쳐먹어라" 라고 소리치게 시켰다.

 

이에 아키나는 "신라 왕은 엉덩이나 쳐먹어라" 하며 끝까지 반항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대치되는 단어가 신라왕인것으로 봐선 실제로는 "일본 천황은 똥이나 쳐먹어라" 라고 했을 가능성이 더 크지만,

 

이 정도까지 원색적인 표현을 쓰기가 어려워서 일본서기에서는 표현을 바꾼것으로 보인다.

 

 

 

여하간에 백제-왜-가야 연합군은 처참하게 대패했다.

 

160년전 백제-왜-가야 연합군의 공세에 고구려의 속국이 되면서 겨우 버텨냈던걸 생각하면 그 사이 많은게 바뀐 것이다.

 

 

가야는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으며, 평생을 전장에서 누빈 이사부는 70세의 나이에 마지막 전투를 승전으로 끝내게 되었다.

 

 

 

 

 

 

1.PN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2.PN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1.PN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신라가 작은 나라라는 이미지 때문에 사람들에게 인식이 좀 약하지만, 

 

진흥왕 시기의 신라의 확장은 사실 엄청난 수준이다.

 

 

진흥왕이 정복 전쟁을 비교적 젊을때 마무리하고 말년(이래봐야 40대 초반)에는 내치와 불교에 집중했던걸 생각하면

 

무려 기존 영토의 3배 수준으로 어마어마한 확장을 단기간에 이뤄냈던 셈.

 

 

때문에 후대에는 땅을 너무 넒혀둬서 오히려 여기저기서 공격을 받게 되었다는 비판(?)도 종종 받곤 할 정도.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한것은 국사 교과서에서도 지겹도록 언급되지만 

 

신라라는 나라의 격을 한층 높여주는 엄청난 사건으로,

 

 

 

사로국 건국 이후 진흥왕 이전까지 수백년간 신라가 중국에 사신을 보낸건 겨우 5번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도 백제나 고구려 사신이 중국에 갈때 곁다리로 가던게 대부분이었다.

 

동시기에 백제나 고구려는 최소 수십번 이상 사신을 보내던 형편이었다.

 

그러나 진흥왕 시기 이후 향후 100년 동안은 40번이 넘게 사신이 왕래하며 중국-서역 문화를 받아들이게 된다.

 

 

 

당대 문명의 최첨단이 중국 왕조고 이와 통하는게 선진 문물을 전파 받는데 영향이 컸다는 점을 생각하면

 

진흥왕 시기가 되어서야 신라는 드디어 지역 변방의 촌구석에서 당대 외교세계의 중심으로 뛰어들었다고 볼 수 있고,

 

이러한 역량이 훗날 백제-고구려 멸망 격동기에서도 어떻게든 몸을 비틀 자리를 주게 된다.

 

 

 

 

 


그런데 사실 진흥왕 시기 영토 확장에 있어서 꼭 짚고 넘어가야할 특이한 점은,

 

단기간에 이토록 넒은 영토를 확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내치에 있어서 신라가 진흥왕의 확장에 따른 부작용을 크게 겪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너무나 멀었던 북방 영토를 이후 고구려에게 다시 내준 것이나, 

 

훗날 무왕-의자왕 당시 백제의 파상공세 등 '외부세력' 의 침공 때문에 영토를 유지하는데 어려웠던 점은 있지만,

 

 

 

 

이토록 넒은 영토를 차지하면서도 신라는 진흥왕 시기 복속시킨 지방 피지배민의 반발에선 비교적 자유로웠다.

 

반란이 있더라도 오히려 내부 진골귀족들의 반란이 있었지, 

 

먹었던 지방의 피지배민이 반발이 극심하여 토해내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내부 지방세력의 반발에 늘 시달리며 고생하던 백제와는 정반대의 부분.

 

 

 

 

이는 진흥왕이 단순히 영토를 넒히는 부분 뿐만 아니라, 

 

이를 유지하는데도 천부적인 감각이 있었다는것을 의미한다.

 

 

 

당장 금관가야를 복속 시켰을때, 금관국 왕의 아들 '김무력' 을 그때까지의 영웅 이사부를 대신하는 존재로

 

대 백제전선에서 크게 키워주었고, 김무력의 손자가 김유신이 될 정도로 지배세력에 큰 문제없이 편입되었다.

 

 

 

 

많은 '진흥왕 순수비' 에서 알 수 있듯, 점령지를 왕이 직접 돌아다니는 불편함을 감수하며 점령지 안정에 크게 공을 들였다.

 

점령지의 조세를 면제하고, 죄수를 풀어주는가 하면

 

순수비의 내용을 보면 왕이 직접 해당지역에 지식인을 대동하고 다니며 지방민들을 교화하고 가르치는 내용이 많다.

 

바로 얼마전에 복속시킨 지역에 대해 신라인이라는 의식을 강하게 키워주고, 이런 지역을 빠르게 동화 시켰다.

 

 

 

 

 

심지어 저 멀리 북방 함경도의 황초령, 마운령까지도 순수하며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내지화에 신경을 쓸 정도였으니, 

 

그보다 가까운 곳에 있는 곳은 어느정도로 신경을 썼을지 짐작이 가는 부분이다.

 

 

 

 

훗날 무왕-의자왕 시기 백제의 파상공세에 저항하는 요지가 되었던 '대야성' 이 바로 복속 시킨 가야지역이다.

 

 

 

또 진흥왕의 이런 모습이 크게 영향을 준게 한강유역에 대한 사민정책이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현재의 충북 충주를 소경(小京), 즉 '작은 수도' 로 까지 천명하고

 

이 지역에 수도의 사람들을 이주 시키는 강도 높은 사민을 진행했다.

 

 

 

 

사민이라는게 많은 불평 불만을 야기하는 일이고, 

 

당시는 이 지역을 차지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상황이었던것을 고려하면 정말 과감한 정치적 결정이었는데,

 

 

이렇게 진흥왕 때에 한강유역을 '내지화' 하는 작업을 철저하게 수행한 결과

 

 

 

 

훗날 무왕-의자왕 시기 백제의 파상공세에 털리며 서라벌 코앞인 경상남도까지 박살나는 와중에도

 

오히려 저 멀리에 있는 한강유역 쪽은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고 지키는 희한한 상황이 나타나게 된다.

 

 

 

 

한강 유역이 얼마나 중요한 지역인지 단숨에 파악한 원대한 정치적 식견이었고

 

 

이 한강유역을 통한 외교 덕에 신라가 멸망 직전에서 오히려 반전 했음을 생각하면 

 

 

진흥왕이 남겨준 안배로 인해 훗날의 후손들이 위기에서 살아남았다고 해도 좋을 수준이었다.

 

 

 

 

 

 

심지어 고구려군이 쳐들어온 660년의 북한산성 전투에서는 고구려군의 파상공세에 직면하여

 

어린이, 노약자, 여자들까지 나서서 고구려군을 상대로 철저하게 항쟁할 정도로 신라인의 의식이 강했다.

 

이는 그만큼 진흥왕의 내정이 성공적이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며,

 

 

 

 

땅을 점령할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점령했다는 점,

 

이런점이 오히려 진흥왕이 단순히 땅을 넒힌 것 이상으로 대단한 군주였다는 사실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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