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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 징비록을 기억해야 한다

광개토대령 광개토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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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조시대 유성룡(1542~1607년)이 임진왜란 겪은후 저술 했다는 징비록의 징비(懲毖)란 말은

조선 조정이나 이황의 제자인 유성룡이 처음 만들어 낸 말이거나 창안 한 것은 아니다.

3 경의 시경(詩經)에서 처음 출현하며, '나의 지나간 일을 스스로 문책하고(나무라고: 懲), 뒷에 또

이런 일(근심)이 있을까 근신(삼가,경계:毖)한다' 란 뜻을 지니고 있다.즉 권력자들 몫이란 뜻이다.

일반 백성들은 징비를 하려고 해도 모두 노비의 신세인지라 징비할 것이 없었던 세상이었다.

 

국보 1221 호로 지정되어 있는 징비록에는 유성룡이 쓴 서문에 잘 나와 있듯이 어디에서 일어났던

임진왜란 이든지 그 전란의  쓰라린 경험을 거울삼아 두번 다시는 그러한 수난을 겪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한다는 민족적(권력적,조정) 숙원에서 책명을 시경에서 빌어 '징비록' 이라 했던 것이다.

사실 징비록의 징비는 현실의 한국 지배계급들의 과거 친일행적(1910년이후)과 비교해 현재(2015년)

의 오류인 그 무엇을 반성해야 함을 더 징비로 해야 한다.지금의 한국 부자들과 권력자도 부자 중심과

돈 중심이 아닌 인간중심의 일반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고, 미래의 환란을 미리미리 대비 하라는 

서애의 메세지를 TV에서 사극으로 선택 했을수도 있다.(그러나 양반중심의 역사를 강조하고 세뇌하기

위함도 당연히 있음)

 

2,왜란시 본의 아니게 영의정과 4도 체찰사 란 중책을  맡았던 서애(西厓)는 임진왜란 뒤의 삼가할 내용을

지배자들의 각성을  목표로 쓰려고 했으나 징비를 할려면 이전의 일도 알아야 하기에 기록할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는 난의 화(禍)에 대해 쓰기를 참담함 그 자체를 말하고 있고,왜의 침입 10 일만에 온 나라가 모두

유린되고 3 도읍(경주,한성,개성)이 함락되는 등 나라가 쑥대밭이 됐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그럼에도 권력의

벼슬아치라고 나만이라도 살겠다고 도망을 했던 왕(선조)의 행적을 권력부의 입장에서 '파천'이라고 쓰기는

한다.그런데 징비록 내용의 소비처(적용세력)가 일반 백성들은 될수가 없고 단지 당대의 권력자들과 있는자

들의 각성을 촉구 했다는 데 있다.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권력자들과 있는자들은 각성에는 괸심이 없다.

 

징비록에 들어있는 '상소,장계(민정을 살핀 보고서),차자(箚子:간략 상소문),문이,잡록 등은 당시의

97% 백성들과는 아무런 해당 사항이 없는 것들이다.지금봐도 뭔 소린지를 알수가 없다.또 봐도 이게

글자는 검고 종이는 힌것 이란 것을 구분 할 뿐이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권력부이자 지휘부에 있는 사람들이 정신 차리고 국가와 민족(백성)을 위한다고

한다면 변란이나 침략과 같은 그 어떤 사변도 감당할수 있었을 것이다. 기록들에서 보듯 왜란 발생시

조선의 경향 각지 관군과 지방군들의 대부분이 도망을하거나 몸을 사리고 숨었다는 기록만 보아도 알수

있는 것 처럼 옛날이나 지금이나 권력의 가렴주구는 변함이 없는 듯 하다.

 

3, 선조가 죽던해 징비록의 저자인 서애 유성룡도 유명을 달리한다.국가와 민족을 보위하기 위해서는

이 징비록 같은 충고의 저술이 뼈가되고 살이 됨에도 당시의 조정대신들이자 각 당파들의 수뇌부 들은

권력(돈) 싸움에 골몰했고,있는 것들이 더 아귀다툼으로 챙겼다.광해군 보다는 정치를 더 잘 해보겠다고

쿠테타로 정권을 탈취한 쪼다 인조는 서인의 반정공신 이괄에 까지 쫓껴나,욍이 된지 1년 만에 또 도망을

가는 왕이 되고 유성룡이 죽은지 20년 째되는 해인 1627년(정묘호란) 에는 마침내 북방의 실세로 떠오른

청(후금)의 눈치를 못체고 까불다가 3 만 군사의 침략을 받자, 다시 강화로 도망을 가는 찌질한 왕을 두는

봉건왕조의 나라로 일제 사가들이 만들어 놓는다.

즉 선배가 그 토록 말해 놓은 징비를 서인들은 징비(懲毖)를 하지 않은 것이다.그래서 20년 만에 또 침략을

당하고 도망을 했던 것이다.이렇게 나라고 백성이고 이렇게 나만 살겠다고 도망간 선조(宣祖)를 우리는

역사에서 '소경대왕(昭敬大王) 이라고 부르고, 찌질한 인조를

장목대왕(莊穆大王) 이라고 부른다. 대왕이 이지경인데 그 휘하의 민초들의 삶이란 과연 헤아릴수는

있었을 런지가 궁금할 따름이다.인간의 삶이 가능했을 것이란 희망을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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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송밍 Bro 포함 2명이 추천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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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털보형님 21.08.05. 06:02

와 역사공부 하는것 같습니다. 매사에 항상 감사함을 느끼게 되네요. 이러한 위인분들이 계심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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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등 blueskykim 21.08.05. 10:10

우리 나라에서 임진왜란에 대해 가장 깊이 있는 콘텐츠를 갖고 있는 곳이 진주의 국립진주박물관인 듯해.

 

박물관 통째로 임진왜란 컨셉을 만들어 놨거든. (경남 진주가 임진왜란과 관련이 깊음)

 

관심 있는 브로는 근처에 갈일 있으면 들러보는 것도 좋을 듯.

3등 송송밍 21.08.06. 14:43

와 브로 진짜 역사공부하는것같아 유익합니다

항상 매사에 감사하고 위인분들에 대한 감사함을 한번더 느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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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연배우 21.08.11. 08:51

브로 글 읽고 역사공부 다시 한번 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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