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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만화 페미니스트인 척하는 남자를 조심해 <아주 오래된 농담>

llewy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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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인 척하는 남자를 젤루 조심해야 된데. 위선자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족속이래나 봐."

박완서 작가님이 2000년에 발표한 장편 소설 <아주 오래된 농담>에 나오는 한 대목이야.

온라인 상에서 젠더 갈등이 수면 위로 올라온 후로 갑자기 이 문장이 자주 보이더라고.

 

'갓완서 작가님 놀라운 혜안 ㄷㄷㄷ' 뭐 이런 식의 제목으로.

훌륭한 작품이 사회적 변화를 계기로 다시 재조명 받는 건 좋은 일이지만

이런 문장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도 알아두면 좋지 않을까?

 

 

 

이 책의 주인공 심영빈은 유명 대학병원의 의사인데 위로는 미국으로 떠나서 사업을 하며 가족과 거의 만나지 않는 형인 영준, 아래로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늦둥이 여동생 영묘가 있어.

 

그리고 아내는 국어 교사인 수경이고 부부 사이에는 딸만 둘 있어(이거 중요한 부분!). 형은 미국에서 거의 연락도 안 하지만, 여동생 영묘와는 아주 각별한 사이. 영묘는 재벌가의 아들인 경호와 결혼했어.  

 

 

image.png.jpg

 

대략적인 주요 인물들의 관계도를 정리하면 이 정도로 보면 될 것 같아.

 

작품을 끌고가는 플롯은 크게 두 줄기인데, 하나는 주인공 영빈이 첫사랑인 현금과 외도하게 되는 과정이야.

 

현금과 영빈의 어린 시절 인연부터 시간이 한참 지난 후의 우연한 만남, 현금의 드라마틱한 삶,

가장과 의사로서 인생의 부담감에 질식할 것 같던 영빈이 가식없는 현금에게서 해방감을 느끼고

외도를 시작하게 되는 내용이 가장 주 내용이 될 것처럼 부각이 되지.

하지만 사실 이 부분은 서브 플롯에 가까워.

 

다른 하나의 플롯은 여동생 영묘와 결혼한 재벌가의 아들 경호가 암에 걸리게 되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이야.

그리고 이게 사실상 책의 주제 의식을 보여주는 주플롯이지.  

영빈은 환자가, 그러니까 경호가 자신의 병세에 대해서 당연히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해.

 

태어난 것도 죽는 것도 선택은 아니지만 어떻게 죽느냐 정도는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중략) 죽을병을 아니라고 속이는 것은 아주 귀중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권리를 빼앗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경호의 재벌가 가족들은 그가 받을 정신적 충격을 걱정해 절대로 알리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지

예전부터 마음이 약하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오히려 더 빨리 삶의 의욕을 잃을거라고 말하면서.

 

영묘는 두 의견 사이에서 고민하지만 결국 경호의 집안 사람들 뜻을 따르기로 결정해.

그래서 경호는 병원에서 현대 대체 의학과 무당의 굿을 들으며 남은 삶을 보내게 되는거야

경호를 간호하면서도 영묘는 계속 회의감을 느끼지.

 

얼마 남지 않은 금쪽 같은 시간을 저렇게 등신처럼 살게 해서는 안 된다. 단 며칠을 살아도 살맛을 온전하게 느끼며 살아야 할 게 아닌가. 사는게 싶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결국은 죽을 줄 아는게 생을 아름답고 살맛하게 한다. 안다는 건 그렇게 좋은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희망이 없는 것은 절망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묘는 결국 경호의 집안에 맞서지 못하고 무력하게 남편을 세상에서 떠나보내.

제사를 치른 후에 유산의 분배와 자녀의 미래에 대해서 시댁과 갈등하던 영묘는 문득 깨닫게 되지.

경호의 식구들이 끝까지 불치병에 대해 숨겼던 건 그가 처자식을 위해 한 마디 유언을 남기는 것조차 막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경호가 죽는 순간까지 암에 걸렸다는 걸 모르도록 주위 사람들이 그렇게 용의주도하게 신경을 쓴 것은 그가 처자식을 위해 아무것도, 유언마저도 남길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런 고약한 생각은 일단 들기가 잘못이었다. 증거가 있는 것도, 누가 일러준 것도 안인 저절로 우러난 생각을 확신을 가지고 믿어버리게 되니 말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목격이지 망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타인의 생명보다 돈을 더 우선시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작품 내에서 수없이 많이 다루어졌어.

작중에 등장하는 구절처럼 '원망이나 후회, 의심 따위가 결국은 다 돈 문제로 귀결되'는 시대에 돈보다 생명이 더 중요하다고 보편적 상식을 역설하는 작품이 오히려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러나 이 작품이 특별한 건 돈을 위해 지불되는 생명이 가족이라는 점, 그리고 그 타의적 희생의 과정이 가족애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유대관계로 포장되고 있다는 점이야. 경호의 투병은 가족들에게 누구의 손에도 피를 묻히지 않고 상속 경쟁자를 제거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뿐이지.

 

가족은 자신이 제일 잘 알기 때문에 경호를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뒤로는 계산기를 두드리는 모습은 주인공의 독백처럼 '가족애라는 미명 뒤에 실은 얼마나 더러운 욕심과 무자비한 이기심이 숨겨져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부분이야.

 

이렇게 극도로 궁지에 몰린 주인공 남매를 위해서 첫째 영준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등장해서 영묘와 시댁의 갈등이 극적으로 해결되지. 그런데 책은 한참 남았고....

 

가장 큰 사건의 해결로 맥이 빠질 법도 한데, 박완서 작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작품을 이어가. 아무 거리낌 없이 사는 것 같던 현금은 늦게라도 아들을 낳기 위해 방문했던 산부인과에서 수경(영빈의 부인)과 알게 되어, 영빈에게 이별을 고하지.

 

"돈도 나를 움직일 수 없고, 도덕적인 비난 같은 건 안중에도 없고, 난 그게 내가 도달한 최고의 경지, 자유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구. 그 착한 여자에게서 남편을 빼앗는 건 옳지 못한 짓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 있지."

 

영묘가 시댁과 갈라서게 되는 이유가 경호의 죽음 때문이라면, 반대로 영빈이 현금과 헤어지게 되는 까닭은 수경이 임신한 생명의 탄생인거지.

 

그리고 이 내용 부근쯤에서 아까 그 명대사가 나오지 ㅎㅎㅎ

 

"페미니스트인 척하는 남자를 젤루 조심해야 된데. 위선자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족속이래나 봐."

아내는 눈을 흘기며 애교스럽게 말했지만 영빈은 뜨끔했다.

 

아들이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시어머니에게 구박 받는 것을 서러워하던 아내에게 영빈이 '나는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라고 말하자 수경이 받아치는 부분이야. (요즘 시대상이랑 좀 다르긴 해. 벌써 20년이나 된 소설이다 보니 ;; )

 

작품 내에서의 전후의 맥락을 봤을 때, 저 대목이 뜻하는 바는 '남편이 부인이 모르는 죄를 지은 탓에, 죄책감에 가부장적 악폐습에 대해서는 여성 편을 들어주는 것 아니냐?' 라는 뜻으로 봐야 할 것 같아. 작품 내에서는 반농담식으로 지나가는 부분이지만 영빈이 바람 피는 걸 다 아는 독자 입장에서는 서늘한 대목이지.

 

뭐 아무튼 결국 수경은 영빈도 모르는 사이에 2번이나 아이를 유산하고, 결국 마지막에 아들을 임신하는데 성공해. 위에 언급된 산부인과에서 현금과 영빈 아내의 만남은 그렇게 이뤄진거지. 어찌보면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가부장적 폐습이 영빈과 현금의 불륜이 끝나는 계기가 된 셈이야. 

 

이것 참 아이러니한 일 아닌가?

 

 

아무튼 이렇게 열심히 달려왔지만 아직 추가로 설명해야 할 부분이 좀 남았네.

 

책의 마지막 챕터에서 영빈은 치킨집을 운영해 치킨 박이라고 불리는 암 환자를 담당하게 되지.

그는 환자의 아내에게 초기에 암을 발견하게 되어 치료 가능하다고, 엄청난 행운이라고 말해.

그런데 그녀는 남편이 걱정되니 암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

영묘의 시댁 때문에 불신감이 쌓여있던 영빈은 아내의 요청과 다르게 환자에게 암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그리고 얼마 후 치킨 박은 병원에서 자살한 채로 발견 돼.

고치지도 못할 암을 고치기 위해서 그 많은 돈을 쓰는게 가족에게 얼마나 부담이 될지 안다고,

그러니까 극단적 결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적은 유서를 남기고.

자신의 실수에 절망한 영빈이 현금이 일하는 곳을 찾아가 술주정을 하는 걸로 책은 마무리 되지.

 

돈을 위해 암에 걸린 가족의 목숨을 버린 재벌 가족과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 영세 자영업자의 극적인 대비가 불러일으키는 아이러니함이 엄청나지...

 

가족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가장의 모습은 아직 가족애가 허울 뿐이 아닌

진정으로 의미가 있는 가치라는 걸 보여주려는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그런 가족애로는 버틸 수 없는 자본주의의 비정함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처럼 여겨지기도 하더라고.

 

책이 너무 재밌어서 정신 없이 읽다가, 마지막 순간에는 뒷목을 서늘하게 만드는....

그런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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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skykim blueskykim Bro 포함 11명이 추천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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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등 울심마 22.02.08. 20:26

조주빈도 남페미였다고 하더라고요 ㅎ

 

남페미들은 불순한 의도가 다분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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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등 코어멤버 KEI 22.02.08. 21:53

페미니스트인척하는 남자를 조심해, 정말 엄청난 메시지와 통찰이 담긴 이야기다

 

llewyn는 확실히 문화예술쪽에 깊은 통찰과 식견이 있는 브로라는 느낌이 확 다가오는것 같아

 

앞으로 설거지론, 레드필 이론 등이 온라인을 가득 채우게 될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데

 

수많은 남자들이 박완서 책 등을 살펴보며 고전을 찾아 그 지식을 탐구하는 시대가 임박한거 같아

 

앞으로의 세상에서 필요한 책은 지금의 세태를 반영한 소설이 아닐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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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어멤버 NEO 22.02.09. 01:19

정말 좋은 글이네.

 

문장이 술술 잘 읽혀.

 

다만 책 인물들의 이름이 좀 어려워서 브로가 만들어준 가계도가 없었다면 좀 헷갈렸을 듯.

 

남자와 여자의 이름이 뭔가 명확하지 않아서 잘 인식이 안되더라구.

 

그리고 항상 위선자들은 가장 멋있는 척 하지.

 

여자에게 남페미들은 정말 얼마나 멋져.

 

우리 남자들에겐 가장 악질적인 배신자들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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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lee 22.02.09. 08:14

귀귀 페미니스트.jpg

 

이미 답은 나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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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skykim 22.02.10. 22:41

ㅋㅋㅋ 좋은 글이다.

 

이정도 통찰력이 있는 사람들이 사회를 리딩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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