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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90년이 지나 '겁쟁이'들을 사면한 영국 법원

욱쓰
8225 0 0
금지 규정 네 정치&시사 글이 아닙니다

영국 고등 법원은 2006년 1차 세계대전 도중 비겁 행위로 처형당한 306명의 군인들을 사면하였다.

 

종전 90여년 후의 일로 독일과 프랑스가 대체로 종전 10여년 이내에 총살당한 군인들을 사면한 것과 비교하면 이례적으로 늦은 것이었다.

 

영국 72대 총리 존 메이저는, 비겁자들을 사면 하는것은 전쟁에서 명예롭게 죽은 사람에 대한 모욕이 될것이라며 사면을 거부했었다.

 

_75162220_arboretum_getty.jpg 90년이 지나 \'겁쟁이\'들을 사면한 영국 법원

(영국군 국립묘지에 있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총살당한 이들을 위한 위령비.)

 
 
비겁죄로 사형당한 사람 중 일부는 분명 미성년자였다. 허버트 모리슨는 15세에 입대하여 17세에 군무이탈로 총살당했다. 영국 국방부는 역사가 돈 힙킨스에게 보낸 1999년 3월 24일자 편지에서 해당 판결이 문제가 없음을 주장했다. 
 
영국 국방부는 힙킨스에게 이렇게 답했다. '당신은 또한 미성년자인 많은 군인들이 불법적으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다. 14세 이상의 사람은 그의 행동에 대해 법적 책임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당시 육군 규정은 미성년자 군인에 대해 군법으로부터 면제를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중 한명인 파르는 1914년 영국 원정대에 합류한 후 많은 시간을 전선에서 보냈다. 1915년 그는 흔들림(셀 쇼크)으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의 아내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는 내내 몸을 떨었다. 그는 총소리를 참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에게서 편지를 받았지만 그것은 낯선 사람의 필체였습니다. 그는 글을 완벽하게 쓸 수 있었지만 손이 떨려서 펜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
 
 
 
하지만 꾀병으로 의심받고 파르는 다시 최전선으로 보내졌다. 
 

 

(쉘쇼크의 흔한 증상인 떨림. 파르 역시 떨림의 증세를 보였지만 꾀병으로 의심받고 다시 전선으로 보내졌다)
 
 
그는 솜 전투에서 몇달간 고군분투했다. 셀 쇼크가 악화된 그는 의료서비스를 요청했지만 외상이 없기 때문에 거부당했다. 파르는 전선에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결국 파르는 1916년 10월 16일 처형다했다. 그는 처형당하기 직전 군법 재판에서 '내 얼굴에서 가장 친한 친구의 두뇌 파편을 긁어낸 이후로' 자신은 멀쩡하지 못했다고 호소했다.
 
 
 
 

hf-a.jpg 90년이 지나 \'겁쟁이\'들을 사면한 영국 법원

(생전 파르의 사진)
 
파르는 그가 사형선고는 받아도 실제로 사형당하진 않았을 거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1차 세계대전 영국군 중 3000여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그 중 불과 10%인 300여명만이 실제 사형집행을 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르가 항명한 당시는 솜 전투의 절정이었다.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을 기었고 영국 원정군 지휘부는 규율 붕괴와 봉기에 매우 예민한 상태였다.
 
(실제로 불과 몇개월 후 니벨 공세의 실패로 프랑스군은 대규모 항명에 직면하다.) 결국 더글러스 헤이그 장군은 군기 유지를 위해 파르의 사형 집행 영장에 성명한다.
 
 
 

236_74.jpg 90년이 지나 \'겁쟁이\'들을 사면한 영국 법원
(솜전투의 부상병들. 솜 전투에서 양측을 합쳐 120만여명의 사상자가 나왔는데, 전투 결과 연합군은 10km를 진격할 수 있었다.)

 
한편 파르의 대대는 파르가 전선에 나가기를 거부한 다음날 앙크르 고지 탈환 작전에 투입되었는데, 대대원 600명 중 150명이 전사했다.
 
파르가 어째서 극심한 노이로제 반응을 보였는지, 지휘부는 왜 그렇게 군기 유지에 필사적이었는지 이해할수 있는 대목이다.
 
파르의 사후 3살, 4개월의 아이가 있던 아내는 지역 우체국에서 '겁쟁이의 과부들에게는 연금을 주지 않는다'며 모욕을 받았다. 파르의 아내는 남편의 복권을 위해 평생 싸웠지만,
 
결국 이를 보지 못하고 1997년 눈을 감았다. 그의 딸 역시 아버지의 사면을 위해 노력하였고, 결국 2006년에 결실을 이뤄냈다.
 
 
 
 

hf4.jpg 90년이 지나 \'겁쟁이\'들을 사면한 영국 법원
(파르의 아내와 그의 딸. 파르가 총살당하고 2년 후의 사진이다.)

 
 
 

harry-farrs-daughter-92-year-old-gertrude-farr-holding-a-photograph-of-her-father-2H6EXY3.jpg 90년이 지나 \'겁쟁이\'들을 사면한 영국 법원
( 총살당한 아버지의 사진을 들고 있는 거트루드 팔의 딸)

 
 
 

hf6.jpg 90년이 지나 \'겁쟁이\'들을 사면한 영국 법원
(사면을 호소하는 유족들)

파르 유족의 변호사는 당시 군법 재판이 정상적인 사법 절차가 아니었음을 주장하였다. 병사들은 군법재판에서 보통 변호인을 선임할수 없었다.

 
1915년 내려진 정기명령 585호은 보통의 무죄추정원칙이 아닌, 병사들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할수 있는 증거가 있을 때까지 유죄라고 규정했다. 또한 법원 계엄령이 선포되어 병사들의 항소권을 박탈하고 선고 24시간 이내에 형 집행이 가능하게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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