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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부다페스트 대ㄱㄱ

도르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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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2월 부다페스트 공방전에서, 소련군은 독일군 부상병들을 눕혀놓고 전차 캐터필러로 산 채로 뭉개버린 것과는 달리

항복한 헝가리 병사들은 거의 대부분 무사히 살려주었다.
 

하지만 말리놉스키 원수가 승리를 기념하여 부다페스트에서 무슨 짓을 벌여도 좋다고 허락한지라,

헝가리 여성들을 상대로는 야수로 돌변했다.

 

 

임시 병원의 간호사들이 첫 희생자가 되어 ㄱㄱ을 당한 후 총검에 찔려 죽었다.

그 다음으로 노려진 건 여대생들이었다.
 

몇몇 증언들에 따르면, 가장 매력적인 여성들은 2주가 넘게 잡혀 있으면서 ㅅㄴㅇ가 되었다.

요제프 그뢰스 주교는 "열두 살 소녀부터 만삭의 임산부까지, 70%가 넘는 여성들이 겁탈을 당했다."고 전해 들었다.

좀더 믿을 만한 보고서에서는 희생자의 비율을 부다페스트 전체 여성의 10%로 추산하고 있다.

 

 

파시스트 화살십자당에 맞서 싸웠던 헝가리 공산주의자 빨치산들조차도 당시의 상황을

"미치도록 혐오스럽고 흉폭한 광경"이라며 붉은 군대에 애원했다.

 

"부녀자들이 자식과 남편이 보는 앞에서 술취한 군인들에게 ㄱㄱ을 당했습니다.

열두 살밖에 안 된 어린 소녀들이 부모의 품에서 끌려나와

10명이 넘는 군인들에게 능욕당해 성병에 걸리는 일도 허다했습니다.

첫 번째 무리가 윤간을 끝내면 또 다른 무리가 몰려와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우리의 몇몇 빨치산 동지들조차 부인과 딸을 지키려다 독일군도 아닌 소련군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심지어 헝가리 공산당 서기장이자, 훗날 독재자로 악명을 떨칠 라코시 마차시조차 소련군 당국에 호소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약탈 또한 개인 차원에서나, 국가 차원에서나 대대적으로 자행되었다.

유대인들이 소장하고 있던 유명한 미술품들도 약탈 대상이었다.

심지어 중립국 대사관들도 구석구석 약탈당하고, 금고는 폭발물로 터뜨린 뒤 털어갔다.
 

거리의 시민들은 총으로 위협당하며 시계와 지갑을 강도당했다.

살아남은 유대인들도 다른 헝가리인들과 똑같이 소지품을 강탈당했다.

몇몇 소련군은 "전리품"들을 어디선가 구한 유모차에 실어 끌고 가기도 했다.

 

 

 

- 앤터니 비버 저 "제 2차 세계대전" 에서


 

인문학이 이래서 중요하네.. 국방이 얼마나 중요한지 각인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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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신문 철원신문 Bro 포함 1명이 추천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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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철원신문 21.10.17. 10:02

슬픈 역사군요 우리나라도 슬픈 역사가 있죠

모든걸 극복한 우리나라가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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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등 닌자 21.10.17. 11:04

전쟁은 참 아프고 슬픔만을 남겨놓는다.

 

이런 비극이 없기만을 바랄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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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등 폭풍랑 21.10.17. 11:15

전쟁의 참혹함,,,

역사를 알고 과거의 실수를 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역사는 반복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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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식금지 21.10.17. 11:16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승리했지만...그때 사상자가 워낙 많았기에...독일로 진격하는 길에 보이는 독일점령지에 모든 사람을 죽이라는 스탈린의 명령이 있었다더라고...전쟁의...참혹함을 당하지.않기위해 우리도 자주국방에 힘을 쏟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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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skykim 21.10.17. 13:51

정말 2차 세계대전은... 전세계에 광기에 미쳐 날뛰던 시기였나봐.. 끔찍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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